조선 중기 여류 시인(詩人)인 허난설헌(許蘭雪軒)의 묘는 광주읍 초월면 지월리에 있는데, 중부고속도로가 앞을 지나는 안동 김씨의 묘역 가운데 가장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묘는 동호인들이 시비(詩碑)도 세우고 문중에서 주변도 정비하여 넓게 자리잡고 있으나, 바로 아래에 고속도로가 있어 차소리가 매우 시끄럽다.
27세에 요절한 난설헌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의 본명은 허초희(許楚姬)이고, 난설헌은 호이다. 본관이 양천(陽川)으로, 대를 이어 문장으로 명성을 날린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허엽(許曄)이 강릉부사로 재직 할 때 그 곳에서 태어난 난설헌은, ‘홍길동전’을 쓴 허균(許筠)의 누이이다. 경상도 관찰사까지 지냈던 아버지 허엽은 첫부인 청주 한씨와의 사이에서 아들 성(筬)과 두 딸을 두었고, 사별한 뒤 강릉 김씨를 재취하여 봉(篈)․초희(楚姬)․균(筠)을 두었다. 문장가 집안에서 성장한 난설헌은 어깨 넘어로 글을 배워 일찍부터 재능을 인정 받았고, 용모 또한 아름다워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 특히 8세 때 지은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은 그 내용이 뛰어나 신동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재능을 인정 받은 난설헌은 허씨 집안과 친분이 있던 당대의 시인 이달(李達)에게서 본격적인 수업을 받았다. 15세 때 안동 김씨 김성립(金誠立)과 혼인하였으나 원만한 결혼 생활을 하지 못하고 슬픈 나날을 보냈다. 남편과의 사이가 멀어지고 시어머니와 갈등이 심해지자, 난설헌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마음을 달래었다.
원컨대 이승에서 김성립을 이별하고 (人間願別金誠立)
죽어서 길이 두목지를 따르리라 (地下長隨杜牧之)
이런 부인을 남편이 돌보지 않은 것은 당연하였고, 설상가상 난설헌에게는 안팎으로 불행이 닥쳐 왔다. 사랑하던 아들과 딸을 연이어 잃었고, 또한 뱃속에 있던 아이까지 유산되니 그녀의 슬픔은 극에 달하였고, 친정집 또한 옥사가 끊이지 않았다. 1580년 아버지 허엽과 오빠인 허봉이 연이어 객사하자 난설헌은 더 이상 살아갈 의욕을 잃고 오르지 격한 슬픔을 시로 달래며 참고 지내던 중, 급기야는 동생 허균마저 귀양을 가게 되자, 더 이상 슬픔을 참을 수 없었던 그녀는 스스로 강에 몸을 던져 27세의 꽃다운 나이를 마감하였다. 난설헌에게 있어서 죽음은 오히려 피안(彼岸)이요 희망이었다. 전하는 213수의 시 가운데 속세를 떠나 신선이 되고 싶다는 내용의 시가 128수나 될 정도로 그는 살아 있지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조선 봉건사회가 짓누르는 구속과 억압속에 그 재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여 쌓인 불만과 남편으로 인한 주위의 학대와 질시, 거기에다가 친정쪽에 불어 닥친 참화는 그녀에게 죽음을 강요한 것이다. 난설헌이 죽은 뒤 동생 허균은 누이가 슬픔과 체념으로 누에가 실을 뽑듯 절절히 엮은 시를 중국에서 「난설헌집」으로 간행하여 중국인들에게 격찬을 받았다. 그러나 중국인이 지은 몇 수의 시를 허균이 난설헌 작품으로 표절하여 망신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곡자(哭子) 의 슬픈사연
한 많은 생을 산 난설헌의 묘는 근래에 정비하여 깨끗하고 아들과 딸의 묘도 한 옆에 있다. 봉분은 호석을 둥글게 둘러 예쁘다. 문신석과 근래에 세운 장명등․망주석․상석․묘비는 벼슬도 하지 않은 그에게는 한낱 치장에 불과하고, 묘 왼쪽에 있는 아들과 딸의 묘는 마치 쌍분처럼 정답다. 죽어서도 어린 것들을 지켜 주는 어머니의 모정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묘 오른쪽에는 동호인들이 세운 시비가 있는데, 사각형 화강암 기단 위에 오석으로 비신을 세우고, 옥개석은 산 모양의 자연석을 얹었다. 옥개석에는 ‘난설헌시비(蘭雪軒詩碑)’라 쓰여 있고, 정면의 비신에는 자식을 잃은 어미의 슬픔을 노래한 ‘아들 딸을 여의고 [哭子]’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곡 자 (哭子)〉
지난해 귀여운 딸을 여이고 (去年喪愛女)
올해는 사랑스런 아들을 잃었네 (今年喪愛子)
서러워라 서러워라 광릉 땅이여 (哀哀廣陵土)
두 무덤 마주 보고 나란히 서 있구나 (雙墳梠對起)
사시나무 가지엔 쓸쓸한 바람 불고 (蕭蕭白楊風)
도깨비불 숲 속에서 번쩍이는데 (鬼火明松楸)
지전(紙錢)을 뿌려서 너의 혼을 부르고 (紙錢招汝魄)
너희들 무덤에 술 부어 제사를 지낸다 (玄酒奠汝丘)
아! 너희 남매 가엾은 외로운 혼은 (應知弟兄魂)
밤마다 정답게 놀고 있으리 (夜夜相追遊)
이제 또 다시 아기를 갖는다 해도 (縱有腹中孩)
어찌 잘 자라길 바라겠는가 (安可冀長成)
부질없이 황대사를 읊조리나 (浪吟黃臺詞)
애끓는 피눈물에 목이 메인다 (血泣悲呑聲)
비 뒷면에는 삶에 의욕을 잃고 죽음을 예고한 절명시(絶命詩)가 있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 꿈에 광상산에 노닐다 (夢遊廣桑山) 〉
푸른 바다가 요지에 잠겨 들고 (碧海浸瑤海)
파란 난새는 아롱진 난새에 어울렸어요 (靑鸞倚彩鸞)
스물이라 일곱 송이 부용꽃은 (芙蓉三九朶)
붉은 빛 다 가신 채 서리찬 달 아래에 떨어지네 (紅墮月霜寒)
이 시에서 보듯 난설헌은 스물이라 일곱 송이의 부용꽃에 비유하여 자기가 27세에 죽을 것을 미리 예언하였으니, 얼마나 처절하고 외롭게 절규하였지를 알 수 있다. 묘 왼쪽에 있는 묘비에는 ‘贈貞夫人 陽川許氏之墓’라고 쓰여 있고, 뒷면과 옆면에는 그녀의 일대기가 상세히 적혀 있다. 이 비는 1978년 안동 김씨 문중에서 세운 것으로, 이숭령(李崇寧)씨는 난설헌에 대하여, “굴종만이 강요되던 질곡(桎梏)의 생활에 숨막혀 자취도 없이 왔다가 간 이 땅의 여성들 틈에서도 난설헌은 우뚝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난(蘭)처럼 청아한 용자(容姿)에 재예비범(才藝非凡)하였던 난설헌은 가슴 가득한 한(恨)과 곱게 가꾼 꿈을 작품으로 승화시켰으니,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시와 글로 인하여 난설헌의 참모습은 오늘에 살아 있다.
난설헌의 시상은 세 가지 경향을 보이는데, 첫째는 신비주의를 추구함으 로써 현실의 환멸에서 초탈하려 하였고, 둘째는 규원(閨怨)과 고독의 상처가 다소곳이 엮어져 한숨으로 얼룩진 여인의 소회(所懷)를 대변하려 하였으며, 셋째는 뼈저린 숙명의 고뇌를 표출해 내었다. 난설헌은 길지 않은 시작(詩作) 생활에서도 많은 걸작을 내었건만, 임종에 앞서 이를 모두 불사르게 하였으니, 펴지 못한 꿈을 함께 거두어 가고자 함이었던가?”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 맹리에 있는 양천 허씨의 선영에는 난설헌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이 곳에는 아버지 허엽을 비롯하여 오빠 허봉, 동생 허균의 묘 등 20여 기의 묘가 있는데, 난설헌의 시비에는 ‘감우(感優:느낀대로 노래함)’라는 연시의 첫째 연이 음각되어 있고, 정면 왼쪽 위에는 네모지게 구획을 만든 다음 그의 친필인 ‘한견고인서(閒見古人書:한가하면 옛 사람의 글을 보라)’라는 단아하고 섬세한 글씨가 새겨져 있다.
김성립(金誠立)과 남양 홍씨의 묘
난설헌의 묘에서 담 옆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묘비에 ’贈吏曹參判 行弘文館著作 金公誠立之墓. 贈貞夫人 南陽洪氏祔’라고 쓰인 김성립의 묘가 있다. 김성립은 28세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홍문관 저작을 지내고, 1592년 임진왜란 때 31세로 세상을 떠났다. 부인 허씨가 죽자 남양 홍씨를 재취하여 살다가 요절한 것을 보면 그의 삶도 결코 평온하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그토록 미워한 부인 허씨였건만, 지금에 와서는 그녀로 인하여 참배객이 줄을 이으니 인생의 영화는 하늘만이 아는가? 난설헌의 묘를 떠나면서 그녀가 읊은 주옥같은 시를 몇 수 새겨 보았다. 한때 친정집이 쇠락하고 불안하자, 금강산에서 운둔하던 작은 오빠 허봉(許篈)을 생각하며 지은 시이다.
촛불이 나직이 흔들리고 (暗窓銀獨低)
반딧불은 높은 지붕 날아 넘도다 (流螢度高閣)
쓸쓸히 깊은 밤은 추워 가는데 (悄悄深夜寒)
싸늘하게 나뭇잎은 떨어져 가네 (蕭蕭秋葉落)
오빠 계신 곳에서는 소식이 뜸하니 (關河音信稀)
이 시름 어찌 모두 풀어 내리오 (端憂不可釋)
청련궁 계신 오빠 멀리서 그려 보니 (遙想靑蓮官)
먼 산은 비어 있고 담 너머 달빛만 희네 (山空蘿月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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