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개를 지킨 포은(圃隱)

    모현면 능원리에는 개천을 가로지르는 좁은 다리 옆에 단심가를 새긴 시비(詩碑)가 커다란 화강암에 새겨 있고, 그 앞에는 정한영(鄭漢永)의 효자비각이 있다. 다리를 건너니 길은 시멘트로 포장되있고, 그 끝나는 곳 왼쪽에 포은(圃隱)의 묘가 있다. 포은은 고려 말의 삼은(三隱) 중의 한 분이시다. 삼은이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통하여 권력을 잡고 조선을 창업하자, 그들의 어떠한 유혹에도 끝까지 고려조의 지조를 지킨 여말(麗末) 3인으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 야은(冶隱) 길재(吉再)를 말하며, 이들은 개성 송악산(松嶽山)을 배경으로 송도의 자랑이기도 하다.

    역성 혁명에 성공한 이성계는 둘째 아들 방원(芳遠)을 시켜 고려에 대한 포은의 충성심과 조선 창국에 협력할 수 있는 지를 알아 보려 하였다. 이 때 지은 시가 「해동악부(海東樂府)」에 한역(漢譯)되어 전하는데, 방원이 하여가(何如歌)부르니,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如此亦何如如彼亦何如)
만수산 드렁츩이 얽어진들 긔 어떠리 (城隍堂後垣頹비亦何如)
우리도 이 같이 얽어져 백 년까지 (我輩若此爲不死亦何如)
누리리라.

    이방원의 시조를 들은 포은은 마음으로 그 뜻을 받아드릴 수 없음을 단심가(丹心歌)로 답하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此身死了死了)
일백 번 고쳐 죽어 (一百番更死了)
백골이 진토되어 (白骨爲盡土)
넋이라도 있고 없고 (魂魄有也無)
님 향햔 일편단심이야 (向主一片丹心)
가실 줄이 있으랴 (寧有改理也歟)

    포은의 회유에 실패한 방원은 조영규(趙英珪)를 시켜 선죽교에서 철퇴로 살해하였다. 그 때 흘린 핏자국이 지금도 얼룩져 남아 있다고 한다. 포은이 집으로 올 때 활을 메고 앞을 지나가는 무사가 있었다. 포은이 녹사(錄事)를 시켜 멀리 떨어져 오라고 이르자, “소인은 대감을 따르겠읍니다. 어찌 다른 곳으로 가겠읍니까.” 하였다. 포은이 살해 당할 때 두 사람이 서로 끌어 안고 죽었는데, 그 당시 창졸간에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 후세에 전하지 않는다. 조선 왕조는 오랫동안 포은의 충절과 기개를 두려워하여 어떤 찬양도, 비각도 세우지 못하게 하였는데, 사후 4백년이 지난 정조 4년(1789년)에 처음 비를 세웠다. 석희박(石希璞)이라는 무명 시인은 선죽교에서 포은의 절개를 시로 남겼다

산천은 의구한데 거리는 비어 있고 (山河依舊市朝空)
저녘 놀 잠긴 곳엔 물소리만 처량하다 (流水殘雲落照中)
말 세우고 홀로 와 옛 자취 찾아 보니 (歇馬獨來尋往迹)
한 조각 비석에 정문충만 남아 있네 (斷碑猶記鄭文忠)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 정포은

    정몽주(鄭夢周, 1337～1392)는 경상도 영천(永川)에서 태어났는데, 모친 이씨(李氏)가 난초 화분을 품에 앉고 있다가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낳아 어릴 적 이름은 몽란(夢蘭)이다. 그 후 포은이 어릴 적에 부친이 또 꿈을 꾸었는데, 용 한 마리가 마당의 배나무에 기어 올라가는 꿈을 꾸고 깨니 몽란이 그 곳에 있어 이름을 몽룡(夢龍)으로 고쳤고, 성인이 된 뒤에는 몽주(夢周)로 다시 고쳐 불렀다. 선생의 자는 달가(達可)요, 호는 포은(圃隱)이다. 부친은 선조 때 추밀원 지주사(知奏事)를 지낸 운관(云瓘)이다. 포은은 어릴 적부터 신동으로 소문이 나 깨우침이 여느 사람과 달랐으며, 20세 되던 1357년(공민왕 6)에 실시한 감시(監試)에 합격하고, 3년 뒤에는 문과에 장원하여 1362년에 예문관 검열(정9품: 史草를 꾸임)이 되었다. 이 당시는 홍건적의 칩입이 자주 있어 수도가 위태로운 지경에 빠진 일이 있었는데, 포은의 문하생이었던 김득배(金得培)라는 사람이 용감히도 싸워 홍건적을 물리치고 서울을 되찾았다. 그러나 간신 김용(金鏞)의 모함으로 효수형(梟首刑: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는 형벌)을 당하자, 포은은 울면서 그의 억울함을 왕에게 호소하고, 원혼을 달래주는 장사라도 지내 줄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왕은 그의 요청을 물리치지 못하고 장사지낼 수 있게 배려해 준 일도 있었다. 이듬해는 여진족을 토벌할 임무를 띠고 한방신(韓邦信) 장군의 종사관으로 참가하여 병마사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여진족을 토벌하는 큰 공을 세웠는데, 돌아와서 친상(親喪)을 입었다. 당시의 풍습은 불교의 영향으로 상제(喪制)가 문란하였으나, 포은은 가례(家禮)에 따라 백 일 단상이 아닌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지극한 효심에 감동한 조정은 정려(旌閭)를 내리며 그 효심을 널리 알리었고, 이러한 정성으로 말미암아 일반 백성들 사이에도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만들어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살아났다.

    포은이 예조 정랑(정5품)으로 있으면서 성균박사를 겸하여 성균관에서 주자집주(朱子集註)를 강의할 때, 어찌나 강의가 사람의 의표를 찌르는지 대사성 이색(李穡)으로부터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라는 칭호를 받았다. 고려 조정의 혼란과 무력함에 위기를 느끼고 개혁을 주장하였던 이성계는 당시의 젊은 학자 정도전(鄭道傳)․조준(趙浚)․남은(南誾)과 함께 세력을 날로 키워 갔고, 그 힘이커져서 모반의 위험에까지 처하였다. 포은은 그들을 제거하고자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하루는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석(奭)을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벽난도에 누운 일이 생겼다. 기회를 잡은 포은은 먼저 조준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이성계의 아들 방원이 낌새를 알아 채고 부친인 이성계에게 사실을 알려, 이성계는 밤을 새워 개성으로 돌아와 조준을 죽이지 못하게 하였다.



     명정(銘旌)이 정한 묏자리

     차로 약 5분정도 올라가면 조그만 개울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에는 주차장이, 왼쪽에는 포은의 신도비가 있는 비각(碑閣)이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포은 묘는 원래 풍덕군에 있었는데, 후손이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永川)으로 묘를 이장하려 하였다. 예를 갖추어 선생의 묘를 옮길 때, 면례 행렬이 이 곳 용인군 수지면 경계에 이르자 갑자기 바람이 불며 앞서가던 명정이 바람에 날아갔다. 날아가는 명정을 쫓아 와 보니 명정은 이 곳에 떨어져 있었고, 이를 심상치 않게 생각한 후손이 지관을 불러 지맥을 보니 명당이라 하여 이 곳에 묘를 안치하였다 한다.

     비각은 현대에 지어 단청이 고운 팔작지붕이고, 신도비는 오래되어 음각된 글자를 판독하기가 어렵다. 묘는 그 곳에서 200m 정도 떨어진 산등성이에 있는데, 재실은 후손집과 연이어 있다. 재실은 기와집으로 정갈하게 지어졌는데, 대문에 붙인 ‘永慕齋’라는 편액은 글씨가 선명하며 서체가 뛰어나다. 재실의 기둥에는 주련(柱聯)이 나란히 있는데, ‘의절천추고(義節千秋高)’라는 주련은 글씨도 예쁘지만 그 뜻도 깊어 숙연한 마음을 갖게 해준다. 재실을 지나 묘로 올라가는 길 양쪽에는 향나무가 우뚝우뚝 서 있고, 한쪽에는 무궁화가 붉은 빛을 띠어 청량(淸凉)하여 곧은 단심(丹心)을 일깨워 준다. 긴 향나무 터널을 지나면 앞이 확 트이며 위편 산등성이까지 초원이 펼쳐져 있는데, 두 개의 큰 묘가 양쪽에 한 기씩 벌리고 있다. 바라보아 왼쪽 것은 포은의 묘이고, 오른쪽 것은 사위이며 대학자였던 이석형(李石亨)의 묘이다.

    묘 뒷쪽은 울창한 숲으로 덮혀 있고, 묘는 곡장으로 단정히 둘러쳐져 있는데, 묘 중앙에는 장명등이, 양 옆에는 석양이 둘 있다. 묘의 봉분은 호석으로 에워싸았고, 문신석은 세월을 머금어 이끼가 끼어 있다. 묘 앞에는 이끼가 끼고 고색(古色)이 창연한 비석이 둘 있는데, 그 중에서 고려에 대한 단심(丹心)과 문묘에 배향된 기록을 보면, “정덕(正德) 12년 정축(丁丑 1527년. 중종 12년) 태학사의 학생들이 임금께 글을 올려, 문충공(文忠公) 정몽주는 충(忠)과 효(孝)가 있고, 이학(理學)에 있어서도 동방(東方)의 시조이며, 사문(斯文:유학)에도 매우 조예가 깊으니 문묘에 배향하길 청한다 하자 임금은 청을 허락하였고, 그 해 9월 17일 그를 문묘의 서쪽 문창후(文昌候) 최치원 선생의 뒷쪽에 배향하였다. 또한 명을 내려 분묘를 수리하고 표석(表石)을 세우게 하였는데, 고려의 벼슬 이름만 쓰고 시호인 문충공(文忠公)을 쓰지 않은 것은 그가 두 왕조를 섬기지 않았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라고 쓰여 있고, 비석 앞면에는 ‘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라고 쓰여져 있다.

    여러 벼슬아치의 비석에 흔히 보이는 수(守)와 행(行)자에 대하여 「대전회통」의 경관직(京官職) 편을 보면 ‘계고직비즉칭행(階高職卑卽稱行:계급이 높고 지위가 낮으면 行)이라 하고, 계비직고즉칭수(階卑職高卽稱守:계급이 낮고 지위가 높으면 守)’라 하였다. 그러나 7품 이하는 두 직급을 뛰어 넘을 수 없고, 6품 이상은 세 직급을 뛰어 넘을 수 없었다. 따라서 묘비에 있는 ‘守’자는, 낮은 직급으로 지위가 높은 문하시중(종1품)직을 수행한 것으로, 능력을 그 만큼 인정받았음을 알 수있다.


    포은의 인생 역경

     고려 말에 몽고족이 세운 원(元)나라가 그 세력을 뻗치자 배명친원(背明親元)의 외교 정책이 대두되어 명나라와의 사이가 나빠졌다. 그러자 명나라는 고려를 치기 위하여 고려에서 바치는 세공을 늘리고, 5년간의 세공이 당초 약속과 다르다 하여 고려 사신을 유배까지 하였다. 이처럼 국교 관계가 악화되자 누구도 화를 당할까 두려워 명나라에 가지 않으려 하였는데, 포은은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된 국교도 회복하고 증액된 세공도 삭감하였으며, 5년간 미납한 세공도 면제받는 공을 세웠다. 이러한 업적과 아울러 1389년 포은은 공양왕을 영립하는 공도 세워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지고 순충논도동덕좌명공신(純忠論道同德佐命功臣)의 호를 받았다. 포은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도 깊어 많은 행적도 전한다. 청렴한 사람을 지방관으로 뽑아 임명하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면 감사를 보내 행정을 엄히 감시하고,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史)에 경력과 도사를 두어 금전과 곡식의 출납도 엄격히 하였다. 서울에는 오부학당(五部學堂),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을 진흥하고 성리학(性理學)의 기초도 세웠으며, 또한 의창(義倉)을 세워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전라․경상․충청도의 세곡(稅穀)을 서울로 조운(漕運)할 때 중간에서 배가 쉬는 수참(水站)을 설치하여 조운도 편리하게 하였다.


     문장가이며 시인인 포은

    포은은 정치가로서 뿐만 아니라 문장가이며 시인으로써 많은 시를 남겼다. 어느 한가한 봄날, 사랑방에서 문을 열고 밖을 보니 초목(草木)이 파란 움을 티우고 있었다. 이에 감탄하여 시를 한 수 읊으니, 그 정취며 시상이 봄의 흥치를 멋드러지게 표현하였다.

〈 봄의 흥취 (春興) 〉
보슬보슬 내리는 봄비는 가늘어 방울이 지지 않고 (春雨細不滴)
밤중에 은은하게 소리만 들린다 (夜中微有聲)
눈은 다 녹고 남쪽 시냇물은 넘치는데 (雪盡南溪漲)
풀은 어느새 싹이 많이 났구나 (草芽多少生)

    또한 포은은 일본과 명나라를 오가며 많은 죽을 고비도 넘기며 갖은 고생을 하였는데, 아무리 대인(大人)이라 할지라도 타향의 외로움과 고적함이 없을 수 없었다. 타국 만리에서 쓴 시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홀로된 외로움이 절절이 배어 있다.

〈 여관에서 (旅 寓) 〉
한평생 남북으로 돌아다니니 (平生南與北)
이 심정은 더욱 괴롭구나 (心事轉蹉跎)
고국은 저 서쪽 해안인데 (故國海西岸)
외로운 배는 하늘 저쪽에 있네 (孤舟天一涯)
창 밖의 매화는 아직 봄이 이른데 (梅窓春色早)
판잣집에는 빗소리가 요란하구나 (板屋雨聲多)
외로이 앉아 긴 날을 보내나니 (獨坐消長日)
괴로워 집 생각이 못내 겨웁다 (那堪若憶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