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군 모현면(慕賢面)은 포은의 절의(節義)를 추모하여 생겨난 땅 이름이다.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의 묘가 포은의 묘 옆에 위치한 연유에 대하여 전해 오는 일화가 있다. 포은의 묘를 고향인 영천(永川)으로 이장할 때 바람에 날린 명정(銘旌)이 떨어진 곳은 사실 지금 저헌(樗軒)의 묏자리이었다. 이 때 포은의 후손이며 저헌의 부인되는 연일 정씨(延日鄭氏)가 이 곳이 명당이라는 말을 듣고 친정집보다는 시댁 가문을 일으키려고 밤새 이 곳에 물을 길어다 부었다. 다음 날 포은을 모시려고 광중을 보니 물이 가득 차 있어 수 없이 옆 언덕에 묘를 썼고, 뒤에 그 자리에는 연일 정씨가 남편인 저헌을 모셨다고 한다.


    삼각산 신령이 점지한 이석형

    이석형(李石亨, 1415～1477)은 본관이 연안(延安)이고, 자는 백옥(伯玉), 호는 저헌(樗軒)으로, 애호군 회림(懷林)의 아들이다. 「월사집(月沙集)」에 의하면 애호군이 늦도록 아들이 없자 삼각산(三角山)신령에게 빌어서 잉태하였는데, 마침 궁궐에서 숙직하다 흰 용이 바위를 쪼개고 나오는 꿈을 꾸었다. 꿈을 깬 뒤에 아들을 낳았다는 기별이 왔으므로 이름을 석형(石亨)이라 하였다. 김양(金洋)의 문인으로 1441년(세종 2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식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는 등 세종 때 무려 세 번이나 장원 급제하여 명성이 자자하였고, 성삼문․박팽년과도 친하게 지냈다. 세종이 친히 고시하여 장원을 정할 때 팔준도(八駿圖)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도록 하였다. 저헌이 처음으로 답안을 냈는데,

하늘이 도와서 임금을 내셨으니 (天佑作之君)
성인은 천년의 운수에 응하였고 (聖人應千齡之運)
땅 위에서 쓰이는 것은 말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地用莫如馬)
신물(神物)이 일시의 재능을 바치도다 (神物效一時之能)


     라고 첫련〔頭聯〕을 삼았다. 성삼문이, “이번 과거에서 두려운 사람은 오로지 이석형 뿐이다.” 하더니, 그의 글을 보고는 속이기를, “말과 임금을 댓귀로 삼았으니 불가하다” 라고 하였다. 이에 저헌이 다른 글귀로 시를 짓자, 성삼문은 그 글귀를 훔쳐서 장원을 하였다. 저헌이 말하기를, “이 무릎을 남에게 굽히지 않음이 오래 되었는데......” 하니, 성삼문은, “남에게 굽히지 않던 그대의 무릎을 내가 굽혔었지” 하였다 전한다.

    그 뒤 사간원의 정원(정6품)에 제수되고 이듬해부터 14년 동안은 집현전 학사로 재임하며 응교․직전(直殿)․직제학(直提學)을 두루 역임하였다. 또한 왕명을 받고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로 학문에 힘쓰기도 하고, 전라도 감찰사도 역임하였다. 그러나 1456년 6월 사육신 사건이 전해지자 그들의 절의(節義)를 상징하는 시를 지어 익산(益山) 동헌에 남긴 일이 있었다.

우(虞)임금 때 두 여인의 대나무와 (虞時二女竹)
진(秦)시황 때의 대부의 소나무가 (秦日大夫松)
비록 슬프고 영화로움이 다름은 있을지언정 (縱有哀榮異)
어찌 냉렬(冷熱)한 얼굴을 하리요. (寧爲冷熱容)

     이 시의 뜻은 순(舜)임금의 두 비(妃)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순 임금이 죽자 상강(湘江)에 빠져 죽어 절부(節婦)의 상징이 되었던 사실과, 진시황이 봉선제(封禪祭)를 지내러 태산(泰山)에 올랐다가 갑작이 비를 만나 소나무 아래에서 잠시 비를 피하고 난 뒤에 그 소나무를 오대부(五大夫)에 봉하였던 사실을 대비시키면서, 비록 대부송(大夫松)이 영화를 누렸고, 이녀죽(二女竹)이 쓸쓸하였다 할지라도 오랜 역사가 흐른 뒤에는 처지가 뒤바뀌게 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녀죽은 사육신을, 대부송은 세조의 공신들을 상징한다. 지금은 세조의 공신들이 영화롭고 사육신들이나 세조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은 형편 없지만 세월이 흐르면 결국 입장이 뒤바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 시가 세상에 알려지자 대간(臺諫)이 벌을 주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세조는, “지은 이의 뜻이 있는 곳을 모르니 어찌 반드시 그렇게 하랴” 하며 물리쳤고, 뒤에 신임을 얻어 예조 참의 올랐다. 1460년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서쪽 지방을 순행하는 세조을 정성컷 모시어 그로부터 ‘서도주인(西道主人)’이라 불리었고, 그 후 사헌부 대사헌․경기 관찰사․호조 참판을 거처 판한성부사로 7년간 있으면서 호패법 시행을 엄격히 하자고 주장하였다. 저헌은 집현전 학사로 있을 때 「치평요람」․「고려사」의 편찬에도 참여하고, 세조 때에는 사서(四書)의 구결(口訣)을 정하는데 참여하여 「논어」의 구결도 주관하여 문장을 떨쳤다. 1470년 성종 원년에 판중추부사에 오르고, 1471년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과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세상을 떠나자 문강(文康)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서도주인(西道主人) 저헌(樗軒)의 유택

    저헌의 묘는 포은 묘와 마찬가지로 울창한 수림을 배경으로 확 트인 곳에 위엄있게 모셔져 있다. 묘 앞에는 문신석이 있고, 한 옆에는 비석이 있는데, 오 백년이 지났어도 글씨가 선명하다. 이 돌은 보통의 화강암이 아니라 차돌로 불리는 단단한 돌이다. 비문에는 ‘有明朝鮮佐理功臣行判中樞府事延城府院君 贈諡文康 李公石亨之墓. 贈貞敬夫人 延日鄭氏之墓.’라고 쓰여 있다. 묘비와 문신석은 오랜 세월에 이끼가 끼어 옛스러우나, 상석과 향로석은 근래래에 세워 대조를 이룬다. 저헌이 경상도 울진에서 읊은 시에는 특출한 기상과 짙은 애수가 짙게 서려 있다.

〈 울진의 동헌에서 (蔚珍東軒) 〉
우뚝한 높은 성은 변방을 진압하고 (高城越絶鎭邊陲)
바로 바다를 눌러 그 형세가 기이하다 (直壓滄溟勢最奇)
물결을 쫓는 거센 바람은 바다를 거꾸러뜨리고 (逐浪雄風吹海倒)
하늘에 닿는 늙은 나무는 구름 기대어 드리웠다 (干霄老木倚雲垂)
고향 생각이야 어찌 다락에 올라 부르짖으랴 (思鄕肯作登樓賦)
술잔 들고 무료하게 달을 보고 시를 읊노라 (把酒聊吟問月詩)
우연히 서로 만나 평수가 마르도록 즐기고 (邂逅相逢盡萍水)
이제 바삐 돌아가려 하나 걸음 오히려 더디네 (欲忙歸去去還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