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제희의 풍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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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이 키운 소설

[숲이 희망이다 27]숲이 키운 소설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숲은 대체로 얼굴이 없다. 그것은 어둡고, 신비하고, 자칫 길을 잃기 쉽고, 불가사의한 존재들이 출몰하는 공간이다. 그러한 숲에는 구체성이 없다. 성배를 찾아 성을 떠난 원탁의 기사들이 제일 먼저 마주치는 것은 숲이다. 그들은 숲의 들머리에서 뿔뿔이 흩어져 길도 없는 풀숲을 헤치며 혼자 나아간다. 컴컴할 정도로 울창한 그 숲에 어떤 식물이 자라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19세기의 문학에서도 숲은 구체적인 얼굴이 없는, 상징과 은유의 공간으로 등장한다. 이름 모를 꽃이 만발해 있고 이름 모를 새들이 우짖는 모호하고도 목가적인 곳. 20세기에 들어서면 상황은 보다 악화된다.


카뮈는 현대 예술의 불모성을 지적하며 ‘헬레네의 추방’이라는 산문에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아름다움을 위해 무기를 들었지만 우리는 아름다움을 추방하여 유배보내 버렸다’고 말하고 있다. 그 뒤에 이어지는 글은 의미심장하다. “‘오직 현대 도시만이 인간 정신에 스스로를 의식할 수 있는 터전을 제공한다’고 감히 헤겔은 쓰고 있다. 이리하여 우리는 대도시의 시대에 살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이후 유럽의 위대한 문학작품들 속에서는 풍경을 찾아보려야 찾아볼 길이 없다.” 그리하여 숲은 작품 속 인물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정지 화면으로 강등되기에 이른다. 대신 카페 창 밖의 가로수나 공원, 강변 둔치, 방파제, 바닷가 호텔과 식당이 전면으로 나선다.


인간이 아름다움을 추방하고 자연으로부터 등을 돌린 채 역사와 이념이라는 거대담론에 몰입한 것은 지난 세기의 벽두부터 시작된 일이지만, 인류의 역사보다 오랜 기원을 갖는 고대종교―애니미즘·토테미즘·샤머니즘―와의 전면전을 선포한 기독교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자연과 인간의 분리를 획책해 왔다. 특히 고대종교와 원시부족들의 제의는 숲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기독교는 그와 같은 성림(聖林)과 수목숭배, 숲의 신과 정령들에 바쳐진 성소를 파괴하고 탄압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고도 완전히 일소되지 않은 심상 속 숲의 원형은 악마와 마녀와 이단의 공간으로 낙인찍었다. 나다니엘 호손의 단편소설 ‘젊은 굿맨 브라운’(1835년)은 이 같은 시대 정황을 잘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 자신의 조상들이 자행했던 마녀사냥과 퀘이커 교도 박해에 대한 참회의 성격을 띠고 있는 이 글에서 주인공은 자기 할아버지의 복장을 한 안내인에게 이끌려 ‘지금껏 한번도 교회가 세워진 적 없고, 외로운 기독교인이 와서 기도를 해본 적이 없는 숲’ 속에서 이교도의 제의를 목도하게 된다. 그런데 그 악마적인 예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마을의 존경받는 목사와 집사와 신도들이다. 그는 그곳에서 자기 아내와 만나게 되고 ‘악마의 숭배자들’로부터 축복까지 받게 된다. 다음날 그는 악몽에서 깨어난 듯 마을로 돌아오지만, 간밤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마을사람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경악 속에 바라보게 된다.


호손의 소설이 몽환극의 성격을 띠고 있다면 오스트리아 출신의 불운했던 작가 아달베르크 슈티프터의 ‘숲 속의 오솔길’(1840년대)은 한 편의 우화로 읽을 수 있는 중편소설이다. 이 작품에서도 주인공은 자신의 익숙한 삶으로부터 분리되어 숲에 이르게 되고 그곳에서 길을 잃고 만다. 그런데 그가 인생의 길을 찾게 되는 것은 바로 이 ‘길을 잃는 행위’를 통해서이다. 숲은 미로가 되지만, 그곳에서 실족한 자들은 숲이 건네주는, 마법에 가까운 선물을 받게 된다.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숲의 통과 의례적인 요소가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자아 회복과 근원으로의 회귀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숲. 20세기에 이르면 숲은 잃어버린 낙원을 복원하고 파괴된 대지의 영성을 재창조하고자 하는 몇몇 작가들에 의해 보다 적극적인 이미지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 신호탄은 장 지오노의 ‘언덕’(1929년)을 통해 예고된다. 외경심을 잃고 자연의 모든 것을 자신들의 잇속을 채우는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인간을 언덕이 단죄한다는, 다소 교조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소설에서 임종을 앞둔 한 노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주변에는 피가 너무 많이 흐르고 있어. 살덩이와 살아 있는 나무들에 열 개의 구멍, 백 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그 구멍들에서 나오는 피와 수액이 뒤랑스 강처럼 세상 위로 흐르고 있어. 그 백 개의 구멍과 천 개의 구멍들은 우리가 우리 손으로 만들어놓은 것이야.” 인간을 포함해 모든 것을 만들고 생존케 한 것은 ‘만물의 주인’인데, 이제 그는 힘을 잃었고 인간이 직접 ‘그의 무릎으로 오르는 길’을 찾아야만 한다. 그러한 길 찾기는 그의 또 다른 소설 ‘영원한 기쁨’(1935년)의 주제이기도 하다.


앙리 보스코의 ‘반바지 당나귀’(1937년)는 자연과의 관계 회복을 낙원의 재창조라는 주제로 심화시키고 있다. 황폐한 고원지대에 샘을 파서 나무를 심고 그 동산으로 지상의 모든 생명체를 불러들이고자 하는 작품 속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바위와 식물과 동물들이 이루는 대지의 왕국과 언약을 맺었다.” 그의 열망은 가히 초인적이라 할 만하지만, 그의 사랑은 잃어버린 한 세계에 대한 향수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아름답고 비극적이며 또 엄숙하기까지 하다.


숲에 연관된 뛰어난 소설로는 이밖에도, 백년에 걸친 한 가문의 가족사를 숲을 중심에 두고 서술하고 있는 아나톨리 김의 ‘아버지 숲’(1989년), 한 변방의 토치카에서 전투를 기다리며 불안과 권태 속에 소일하는 한 병사의 숲 속 생활을 담담하고 시적으로 그린 줄리앙 그라크의 ‘숲 속의 발코니’(1958년), 프러시아의 오리나무 숲에서 출몰하는 마왕과 식인귀의 전설을 통해, 먹고 소유하고 향유하는 차원을 넘어 짊어지는 성스러운 숙명에까지 도달해야 하는 사랑의 참 모습을 그리고 있는 미셸 투르니에의 ‘마왕’(1970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유럽의 두 작가 조셉 콘라드의 ‘암흑의 핵심’(1899년)에 등장하는 콩고의 밀림과 앙드레 말로의 ‘왕도의 길’(1930년)에 나오는 캄보디아의 열대림이 적의로 가득 찬 공간으로 그려지고 있는 데 반해, 브라질 출신의 작가 조르지 아마도의 ‘끝없는 대지’(1942년)에서 묘사되고 있는 아마존의 밀림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객관적인지 비교해보는 것도 의미있을 것이다. 〈김영래/소설가·시인〉 [경향신문 게재]

나무와 속담

동양화 속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