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수원 능 행차

     [수원 80리]
     한양에서 수원까지의 거리는 88리이다. 옛날 임금은 국가의 치안을 위해 80리 밖을 나가는 것이 엄격히 법으로 금지되었는데, 정조는 88리를 억지로 80리라 우기고,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을 수시로 찾아 왔기 때문에 수원 80리라는 말이 생겼다.

     영조(英祖)의 뒤를 이어 1776년 25세의 나이로 조선 22대의 왕으로 등극한 정조는 비운에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사모의 정이 남달랐다. 죽은 후 서인(庶人)으로 폐하고, 묘도 양주 배봉산(拜峰山)에 능이 아닌 원(園)으로 강등된 아버지 사도세자를 이 곳 화산(花山) 언덕에 모시었고, 아울러 시호를 장헌세자(莊獻世子)라 추존(追尊)하고, 묘도 융릉(隆陵)이라 하였다.

     왕위에 오른 정조는 아버지를 죽음으로 이끈 숙의 문씨를 즉시 주살하고, 자주 이 곳에 내려와 아버지의 능을 참배하였다. 참배 행렬은 초창기에는 한양을 떠나 노량진·과천·수원을 거쳐 화산에 이르는 지름길을 이용했으나, 과천 찬우물에 사도세자 죽음에 가담했던 김상로(金尙魯)의 묘가 있어 그 길을 피하고, 노량진·시흥·안양을 거쳐 수원으로 갔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바쁘지 않고 늘 한가한 벼슬아치로 소문난 능참봉도 잘못 걸리면 한 달 29일을 제사지낸다는 말이 생겨났다.

     [김상로의 묘]
     김상로(金尙魯, 1702∼? )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풍(淸風)이고, 호는 하계(霞溪)·만하(晩霞)이다. 1759년 영의정에 올라 영조가 세자인 사도세자를 죽이는 일에 적극 가담하여 1762년 마침내 세자를 죽게 하니, 그 후 영조가 그 일을 후회하게 되었고, 그는 청주로 귀양을 갔다. 죽은 뒤 정조에 의하여 관작이 추탈되었다가 고종 때 신원되었다.

     하계의 묘는 과천에서 안양을 넘는 고개 아래 '찬우물' 마을에 있었다 하는데, 이 마을 뒷편 산기슭에는 현재 하계의 묘는 없고, 다만 그의 형인 김약로(金若魯)의 묘가 있다. 곡장을 두른 이 묘는 좌의정을 지낸 분의 묘답게 모든 석물이 잘 갖추었다.

     지금도 마을 입구에는 임금이 수원에 행차할 때 목을 추기었다는 '가자우물'이 있고(현재는 먹지 않음), 마을 안쪽에는 예전부터 있어온 찬우물이 있다. 이 우물은 여름에도 목욕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는데, 지금은 뚜껑을 덮고 모터를 설치하여 주민에게 우물물을 공급하는 수원지로 바뀌었다.

     [만안교]
     안양시 석수동의 안양천 위에는 1795년에 조성된 '만안교(萬安橋)'가 있다. 정조가 수원으로 행차할 때에 건넜던 다리로 당시 경기 관찰사·병마수군절도사와 수원·강화·개성 유수까지 동원되어 7개의 홍예 수문과 그 위에 화강암 판석과 장대석을 깔아 축조하였다 한다. 만안교 앞에는 귀부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을 얹은 비석이 있다.

     정면에 붉은 글씨로 '萬安橋'라고 새겨진 이 비석은 이 다리를 놓을 때 경기도 관찰사를 위시하여 여러 유수까지 동원된 사실을 기록하여 놓았다. 본래 이 다리는 이 곳에서 남쪽으로 약 200m 아래에 있었는데, 국도 확장으로 1980년 이곳으로 옮긴 것이고, 길이 31.2m, 너비 8m에 현재 아랫부분이 모래 속에 묻혀 확실한 상태는 알 수 없다.

     7개의 수문은 매끄럽게 다듬은 장대석을 촘촘하게 잇대어 아치(Arch) 형으로 만든 홍예문 석교이고, 그 사이에는 크고 작은 선단석(扇單石)과 잠자리형으로 다듬은 무사석을 차곡차곡 쌓아 메꾸었다. 아치 상단의 이맛돌은 중앙부를 둥글게 다듬은 장군형 무사석으로 연결하고, 그 윗면에 장대석을 쌓아 바닥을 만드니 튼튼한 다리가 되었다.

     [지지대 고개]
     지지대(遲遲臺) 고개는 한남정맥의 백운산에서 수리산으로 이어지는 낮은 고개로 고개 서쪽에 "지지대 비"가 서 있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러 갈 때 이 고개에 이르러 능을 바라보면서, "왜 이리 더디냐" 라고 역정을 내었고, 돌아올 때는 이 고개에서 행차를 멈추고 다시 한번 융능(隆陵:사도세자 의 능)을 쳐다 보느라고 서울 행차가 늦어져 이래저래 '지지대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지지대 비각(遲遲臺碑閣)'은 이 고개 마루 오른쪽에 있는데, 오석에 홍문관 제학 서영보(徐榮輔)가 교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윤사국(尹師國)이 글씨를 쓰고, 전자(篆字)는 수원부 유수 홍명호(洪明浩)가 쓴 것이다. 비문은 고개 아래의 '효행기념관'에 전시된 탁본으로 볼 수 있다.

     [수원 능행도]
     현재 호암미술관(湖巖美術館)에 소장된 작자 미상의 그림인 '능행렬도(陵行列圖)'는 정조가 화산의 아버지 능을 참배하기 위해 행차하는 그림인데, 그 그림을 보면 당시의 왕 행차의 모습을 자세히 알 수 있다

[사진 : 호암미술관 소장 '능행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