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은 청운동 인왕산 아래에 있는데, 집 오른쪽에는 커다란 바위가 버티고 서 있고, 산골 물 흐르는 소리와 산기슭을 훑으며 오르내리는 바람소리가 좋은 터이다." 고(故) 정주영 회장은 인왕산의 동쪽 기슭인 청운동에서만 40년을 넘게 살았다. 그런 연유로 정 회장의 손때가 묻은 '청운동 자택'은 맨주먹 하나로 한국 경제의 거봉(巨峰)이 된 정 회장이 기업경영에서 쌓인 피로를 풀고 활력을 되찾던 쉼터라는 의미를 뛰어넘어 현대가(現代家)의 구심점이 됐다.
고 정 회장이 말년에 정몽구 회장에게 이 집을 물려주자, 세상에서는 정몽구 회장이 현대가의 적자(嫡子)로 인정받은 증표라며 입방아를 찧었을 정도로 이 주택은 계동 사옥과 마찬가지로 현대가의 법통을 물려받은 종손(宗孫)이 살 집이란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1958년에 지은 이 주택은 50여일에 걸쳐 블록으로 2층까지 후딱후딱 건축한 다음, 남은 돌을 이용해 외벽을 붙인 집이라고 한다. 초록색의 맞배지붕인 본채를 먼저 건축한 다음, 단층 슬라브 건물인 식당을 달아 붙였다. 그 결과 식당 부분의 돌 색깔은 본채와 서로 다르며, 마당에는 별스런 조경없이 잔디만 넓게 깔렸다.
청운동은 본래 이곳에 있던 청풍계(淸風溪)와 백운동의 첫 글자를 따서 지은 지명인데, 깊숙하고 그윽한 계곡에는 맑은 수석이 청풍과 함께 항상 흰 구름으로 덮여 있어 인왕산 내에서도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다. 옛날에는 많은 시인묵객이 찾아와 음풍농월하던 곳이고, 구름 속에서 시냇물이 소리 내어 흐르자, '백년에 걸쳐 맑은 바람이 부는 곳' 이란 뜻으로 '백세청풍'(百世淸風)이란 글자가 주변의 큰 바위에 새겨져 있다.
청운동 자택은 한북정맥의 북한산에서 서진과 남진을 거듭한 용맥이 자하문터널을 지나 인왕산으로 솟고, 여기서 동쪽으로 뻗은 기맥이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로 흘러내린 계곡을 만나 전진을 멈춘 채 생기를 응집한 곳으로, 인왕산의 중턱에 남향 집으로 자리잡았다.
주산이며 수성(水星)인 인왕산과 안산이며 목성(木星)인 북악산이 수생목(水生木)으로 서로 상생의 관계이고, 혈장의 좌우에는 청룡과 백호가 2, 3겹으로 감싸 안아 소위 장풍이 잘 되고 국세가 좋은 집이다.
자택의 앞을 막아선 북악산이 마치 들판에 곡식을 쌓아놓은 노적봉(露積峯)처럼 수려하게 보이니, 이 터는 풍수적으로 '소가 누워서 음식을 먹은 와우형(臥牛形)'의 명당이다. 소는 성질이 유순한 동물로 한 집의 농사를 도맡아 지으며 누워서 음식을 먹는다. 따라서 와우형의 터라면 나라를 경영할 큰 인물을 배출하면서 자손대대로 누워서 음식을 먹을 정도로 재산을 가진 큰 부자가 태어날 땅이다. 그렇지만 와우형의 명당을 너무 요란스럽게 꾸민다면 지기의 발동이 약해지거나 또는 늦어진다. 왜냐하면 소가 누운 외양간은 깨끗하고 소박하면 충분하다. 만약 화려하게 집을 치장하면 소가 오히려 불안을 느껴 몸을 움츠리기 때문이다.
청운동 자택 역시 재벌 회장의 주택에 걸맞지 않게 매우 검소하다고 한다. 옷과 가구는 족히 20년을 넘긴 것들이 즐비하고, 거실에 놓인 TV 역시 1988년 LG전자에서 생산한 17인치 제품으로 골동품에 가까웠다고 한다. 이것은 정 회장이 와우형의 지기에 잘 순응하며 살았음을 의미한다. 또 청운동 자택에는 쌀가게 점원에서 한국 최고의 갑부가 된 '정주영 신화'의 본거지답게 응접실에는 그 다운 좌우명이 걸려 있어 눈길을 끌었다고 한다. 바로 '부지런하면 천하에 어려움이 없다'는 뜻의 '일근 천하무난사'(一勤天下無難事)라고 쓴 액자로, 이것은 고 박정희 전 대 통령이 써 준 휘호다.
근면을 최대의 재산이라 생각했던 정 회장은 바쁘다는 생각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평생을 바쁘게 산 분이다. 가방 끈이 짧아 학식이 부족했던 그는 남보다 앞서기 위해 더 열심히 생각하고, 더 치밀히 궁리한 다음, 당차게 밀어붙이는 추진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해보기나 했어?" 라는 핀잔이 그만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고, 스스로도 자신을 '생각하는 불도저'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아무리 부지런한 불도저라도 휴식은 필요하다. 육중한 쇠뭉치 몸집으로 밀어대는 불도저도 기름치고 조이고 닦아주어야 기능을 제대로 발휘한다. 인간 불도저 역시 편히 쉴 곳이 필요한데, 그와 궁합이 잘 맞아 떨어진 청운동 자택이 바로 그곳이다.
고승이나 선인들은 보통 사람들에 비해 기가 센 사람들로, 주로 기암괴석이 즐비한 명산을 찾는다. 계곡 가까운 곳은 밤낮으로 바람이 불어와 기가 센 사람만이 살 수 있고, 기가 약하면 풍병이 생겨 오래 살지 못한다.
따라서 한국 최대의 재벌을 경영하던 정 회장의 집 터 역시 '왕회장' 이란 별칭에 걸맞게 보통의 집터와는 분명히 다르다. 그곳은 병자호란 때에 강화성에서 장렬히 순절한 김상용(金尙容)의 살림집인 '태고정' (太古亭)이 있던 곳으로, 강화성이 청군에게 포위되자, 김상용은 화약에 불을 붙여 스스로를 산화한 충신이다. 모두 기가 센 사람들로서, 자신들에게 맞는 땅을 찾았다고 볼 수 있다.
청운동 자택은 집 안에 커다란 바위가 있고, 바람이 산기슭을 오르내리는 곳이다. 이것은 흙심이 얇고 찬바람이 분다는 증거로 이런 터에는 기가 센 사람만이 살 수 있다.
기가 센 왕회장과 궁합이 맞는 청운동 자택은 가상(家相) 면에서도 길한 점이 많다. 동쪽으로 뻗은 용맥 위에 건물을 남향으로 앉혀 일조량과 좌향(坐向)이 좋고, 목성의 지붕도 인왕산의 수성과 상생의 조화를 이뤄 길하다. 게다가 지대가 높은 곳이라 북악산이 눈높이로 바라보여 압혈( 壓穴·안산이나 조산이 혈보다 지나치게 높으면서 가까이 있으면 혈의 생기를 눌러 흉하다)의 살기(殺氣)까지 제압했다.
하지만 정면의 계곡만큼은 찬바람이 부는 통로이니, 나무를 심어 방풍하거나 작은 조산(造山)을 두어 차폐시키면 좋겠다. 현재 이 집은 빈집으로 남아 있는데, 땅의 성격으로 보아서는 정치에 뜻을 둔 자손이 살면 청운(靑雲)의 길이 속히 열릴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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