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천석꾼’ 혹은 ‘만석꾼’이라 해 토지에서 생산된 쌀의 양을 가지고 부(富)를 가늠하는 잣대로 삼았고, 땅이란 사람이 들인 정성만큼 보상해 주는 정직한 존재로 생각했다. 그런 한국인의 정서가 남부럽지 않은 대기업을 일군 농부의 아들, 현대 그룹의 고 정주영 회장의 가슴 속에 흐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어린 시절 손바닥만한 농토에서 하루 종일 허리가 휘도록 일해도, 가난을 면할 수 없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정 회장의 머리 속엔 늘 일밖에 모르며 살다간 아버지란 존재가 살아 있었고, 이런 부친에 대한 연민은 어느날 광활한 농토를 마련해 영전(靈前)에 바침으로써 한(恨)을 풀어 주겠다는 신념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간척사업이 돈벌이로는 취약한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혼신의 힘을 기울인 이유 중 하나다.

굴곡이 많은 서해안은 간척사업을 통해 국토를 확장시킬 여건이 매우 용이한 지역이다. 정부는 부족한 식량을 더욱 증산시킬 목적으로‘공유 수면매립법’을 특별령으로 개정하면서 민간기업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때마침 독자적으로 간척사업을 꿈꾸고 있던 정 회장은 천혜의 조건을 갖춘 천수만을 주목한 후 마스터플랜을 구상했다.

이것은 국토를 확장시키는 일 이외에 고용 창출과 산업을 발전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 해외 건설수주가 줄어들면서 해외에 나가 있던 유휴 인력과 장비를 재활용할 대안으로 서산 앞바다의 공유수면 매립을 결심했고, 정치적 혼란이 지나간 82년 봄이 돼서야 비로소 착공이 이뤄졌다.

천수만을 막아 개척한 서산 A, B지구 간척지는 행정상으로 서산시 부석면에 속한 공유 수면들이고, 또 이곳은 부석의 도비산에서 출맥한 지맥이 간월호와 부남호 사이로 남진한 다음 바다를 만나 전진을 멈춘 곳이다. 안성의 칠현산에서 한남정맥과 갈라선 금북정맥은 천안의 흑성산을 거쳐 보령의 오서산으로 솟더니, 몸을 재차 북진시켜 예산의 가야산으로 솟아 났다.

그리고 가야산을 떠난 지맥은 서진을 거듭한 후 서산의 부춘산으로 기세를 가다듬고, 다시 몸을 부메랑처럼 휘고 꺾은 채 도비산까지 뻗어 왔다. 따라서 천수만이 자리한 부석면은 칠현산이 태조산이고, 가야산이 중조산이며, 도비산이 소조산이다. 여기서 천수만 부석면 도비산의 지명은 모두 언젠가는 이곳의 바다가 흙으로 메워져 농토로 바뀔 운명을 예언한 땅 이름들이라 흥미롭다.

먼저 천수만(淺水灣)은 ‘바닷물이 얇은 곳’이란 뜻으로, 이곳은 하루에 두 번씩 바닷물이 빠질 때면 지평선이 멀리 보일 정도로 개펄이 드러나던 곳이다. 따라서 어장보다는 개펄에서 나는 굴과 조개가 유명했던 곳이다. 이곳의 특산물인 ‘어리굴젓’은 600년간이나 궁중에 진상되고, 근래에 들어서는 ‘서산 갯마을’이란 노래까지 유행했다. 따라서 썰물 때 밑바닥이 들어났던 3300만평의 개펄은 국토로 뒤바뀔 운명이 점지돼 있었다. 정부 역시 일찍이 이곳에 노동자 숙소까지 지어놓고 간척사업을 추진했으나 기술상 어려움에 부닥쳐 포기했고, 뒤를 이어 현대건설이 매립 허가를 따낸 것이다.

또 부석면(浮石面)은 ‘적돌강에 있는 큰 바위가 밀물 때도 물에 잠기지 않고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 붙여진 지명이나, 이보다는 바위들이 물에 둥둥 떠다닐 땅임을 예언한 말로 봐야 한다. 천수만은 조석으로 간만의 차이가 심해 예로부터 급류로 인해 선박의 침몰이 잦았던 곳이고, 6400m에 이르는 A지구 방조제 공사 중 마지막 270m 구간의 물살은 초속 8m에 달했다. 쳐다만 봐도 몸이 빨려 들어가 버릴 것 같은 무서운 속도의 급류로서, 승용차만한 바위도 들어가는 순간 쓸려 내려갔고, 철사로 두세 개씩 엮은 돌망태기 역시 아무리 쏟아 부어도 속수무책이었다. 즉 바위가 물에 둥둥 떠다닐 땅이란 뜻의 ‘부석’(浮石)이란 지명이 신기하게도 맞아떨어진 셈이다.

‘궁하면 통한다’고, 절벽에 부딪힌 정 회장에 머리에는 번쩍하고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고철로 쓰려고 30억원에 사다 놓은 워터 베이호를 가라앉혀 물살을 막고는, 그 즉시 바위를 투하시켜 물막이 공사를 성공시켰다. 그 유명한 ‘정주영 공법’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또 천수만 안쪽에 오밀조밀 있던 무인도는 부석의 진산(鎭山)인 도비산(島飛山·351m)의 용맥이 서해안으로 뻗으면서 솟아난 섬으로 이들 역시 애초부터 방조제 공사로 인해 모습이 사라질 운명을 타고난 것들이었다. 총 연장 7686m의 A, B지구의 방조제 공사를 위해 사용된 흙과 바위의 양은 실로 엄청난 양이었다. 140여대의 15t 트럭 분량이 1년 반에 걸쳐 바다에 쏟아 부어졌는데, 처음에는 간척 예정지의 섬을 허물어 흙과 바위를 조달했으나 나중에는 현장에서 30㎞나 떨어진 곳의 석산을 개발해서 부족분을 실어 날랐다. 그 결과 옛날부터 있어 왔던 산과 섬은 어느날 굉음과 함께 나타난 덤프 트럭에 실려 사라지고, 그 대신에 바다 쪽에 방조제를 만들기 위한 흙더미가 산처럼 쌓였으니, ‘섬이 날아다닌다 ’라는 뜻의 ‘도비’(島飛)라는 지명이 그대로 이뤄진 셈이다.

좁은 국토의 확장과 식량의 자급자족이란 소망을 담아 이룩한 서산 A, B지구 간척지는 사업이 어려워 민간에게 소유권을 팔았으니 더 이상 현대건설의 소유가 아니라는 토지대장상 지주의 개념을 넘어선 지 이미 오래다. 그보다는 강인한 정신력으로 어려운 악조건을 극복한 인간의 위대함이 실현된 곳이며, 또 옛날부터 바다가 농토로 바뀔 것임을 지명으로 예언했던 선각자들의 혜안을 한 번쯤 되새겨 보는 장소로 기억될 역사적인 현장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