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제희의 풍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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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마리 학처럼 살다간 실학자, 유형원

    명당이 많아 휼륭한 분을 여럿 모신 용인 지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있다. 이 분은 과거에 급제도 못하고 초야(草野)에서 고적하게 보낸 분이지만, 세상을 떠난 뒤 1백 년이 지나서야 학문의 업적과 저술이 빛을 보게 되었다. 벼슬이라곤 세상을 떠난 뒤 통정대부로서 집의 겸 세자시강원 진선에 추증된 것에 불과하니, 인생으로서 출세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조선 후기 실학을 학문의 위치로 자리 잡게 한 공로는 매우 대단하다. 이 분이 바로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이며, 묘는 외사면 석촌리 능말에 있다.



    부안에서 꽃 피운 실학사상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의 본관은 문화(文化)이고, 자는 덕부(德夫), 호는 반계(磻溪)이다. 예문관 검열을 지낸 흠(欽)의 아들로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18세에 부사 심은(沈誾)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반계가 출생한 당시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광해군이 폭정을 일삼아 사회가 극도로 혼란한 시기며, 또한 양반 사회의 모순이 점차 나타나던 시기였다. 전형적인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불행하게도 2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28세에 옥사), 5살 때부터 제주목사를 지낸 외삼촌 이원진(李元鎭)과 당대의 외교관이었던 김세렴(金世濂)에게서 글을 배웠으나, 15세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가족과 함께 원주․양평․여주 등지를 떠돌며 방랑 생활을 하였다.

    두 차례 과거 시험을 볼 때 할머니와 어머니의 상을 차례로 당하여 20대에 공부에 전념할 수 없었기 때문에 두 번 모두 낙방을 하였다. 5세 때 글을 읽기 시작하여 7세 때 서경(書經)을 읽었고, 20세에 문장으로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였으나,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소과(小科)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되었을 뿐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효종 4년(1653) 32세의 젊은 나이로 전라도 부안(扶安)의 우반동(愚磻洞)에 낙향하여 일생을 농촌에 묻혀 제자를 양성하고, 아울러 농촌 사회의 현실을 몸소 체험하며 학문 연구와 저술에 힘썼고, 그 곳에서만 20년을 보내며 1남 6녀를 두고 52세에 세상을 떠났다.

    반계가 부안에서 은거하며 저술한 업적은 실로 대단하나, 현재에 전하는 것은 「반계수록(磻溪隨錄)」 뿐이다. 나라와 백성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는 나라의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여야 한다는 신념으로 정치․경제․문화 전반에 걸쳐 체계적으로 개혁안을 제시한 이 책은, 주로 토지 제도의 개혁과 교육 및 관리 임용의 개혁에 촛점을 맞추었다. 반계는 이 책의 저술 동기에 대하여, 첫째 절박한 현실 문제를 지적하면서, 대토지를 소유한 자가 있는 반면 송곳을 꽂을 만한 조금의 토지도 갖지 못한 사람이 있어 유랑민이 생기고, 이웃에 피해가 전달되어 농민 생활이 파탄에 이르고, 둘째로는 모든 법제(法制)가 권력자의 사욕을 채우기 편하도록 되어 있어 백성이 편안히 살 수가 없으며, 특히 노비 세습제는 천하의 악법이며, 셋째는 당시 학자와 관료의 학문하는 태도에 대하여, 과거를 거쳐 관리가 된 자는 백성을 다스릴 자질이 부족하고, 재야의 학자는 자신의 수양에 전념할 뿐 통치의 학문을 소홀하게 하여 천리(天理)가 구현되지 못한다 하였다. 반계가 간 지 1백년이 되어서야 그 인물됨과 「반계수록」의 내용이 알려졌고, 특히 영조(英祖)는 초고(草稿)를 직접 읽어 보고 칭찬과 더불어 책으로 펴내어 세상에 알리도록 명하였다. 이미(李瀰)에 의하여 「반계수록」이 1770년 세상에서 빛을 보게 되니, 반계가 세상을 떠난 지 꼭 97년 되는 해이다. 1753년 조정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통정대부로서 집의 겸 세자시강원 진선을 추증하였다.



    위엄 있는 반계의 유택

    반계의 유택에 이르는 길은 용인에서 304번 국도를 따라 어두니고개를 넘어 백암에 이르는 길과 영동고속도로 양지 인터체인지를 나와 양지리에서 백암으로 이르는 길이 있다. 백암에서 장평리를 지나 조금 더 가면 다리가 있고, 그 건너에 느티나무가 있는데, 이 곳이 석천리이다. 다리에서 개천을 따라 난 도로로 약 2km 정도 올라가면 능말이 나온다. 뒷산의 형상이 능(陵)과 같다 해서 생긴 땅 이름이라고 촌로는 말한다. 능말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개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오른쪽 산 밑으로 난 농로를 따라가면 두 산자락이 만나는데, 반계의 묘는 왼쪽 산등성에 있는 3기의 묘 중 가운데 것이다. 1971년 정부 보조로 이 묘역을 정비하였음을 알리는 기념비가 있는 반계의 묘는, 봉분 뒤로 곡장을 두르고 문인석이 양쪽에 있다. 1768년 판중추 홍계희(洪啓禧)가 찬하고 죽산부사 유언지(兪彦摯)가 세운 묘비 정면에는 벼슬명이, 그리고 옆과 뒷면에는 일대기를 새겨 넣었다. 묘비 정면에는 ‘有明朝鮮國進士贈執義兼進善 磻溪柳生馨遠之墓. 贈淑人 豊山沈氏祔左’라 고 쓰여 있다. 상석과 향로석 틈에는 말벌이 집을 짓고 부지런히 드나들고 있는데, 언제부터 집을 짓고 살았는지 겉까지 벌집이 드러나 보이며, 문인석은 눈이 부리부리하고 꼭 다문 입술에 한 쪽만이 홀(笏)을 들고 있는 보기 드문 모습이다. 비록 벼슬이 진사(進士)에 그쳤지만, 반계가 남긴 개혁 의지와 사상은 당시 조정과 관리에게는 지침서가 되었다. 또한 실학을 학문의 위치로 자리 잡게 한 기틀이 되었으니 정승에 비길 수 있으랴. 시골에 묻혀 당시의 사회상을 냉철히 판단하고,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의연히 산 반계는 한마리 학(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지막한 산들이 연이어 솟은 변산반도 아래에 우반동(愚磻洞)이라는 마을이 있다. 지금의 이름은 ‘우동리’ 또는 ‘우바이’라 부르지만, 계곡물이 옆으로 흘러 한적한 곳이다. 이 곳은 3백 50년 전 32세의 반계가 찾아와 나라를 바로 잡고자 하는 일념으로 저술과 학문 연구에 몰두하여 「반계수록」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긴 곳이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 이 곳은 반계의 할아버지가 터를 닦아 놓은 곳으로, 반계는 이 곳에서 1만 권이나 되는 책 속에 파묻혀 꼬박 밤을 새우며 연구에 몰두하였다 한다. 낮에는 농사일과 송림 사이로 뛰노는 사슴을 구경 하는 등 한적한 선비로 지내다가, 밤이 되면 연구와 저술에 힘써 마을 사람들은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였다. 찌들린 살림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만 ‘고요한 생활이 있는 뒤에라야 편안할 수 있고, 또한 생각할 수 있다.’는 옛 사람의 글을 되새기며 서실에서만 지냈다. 전하는 일화로, 한번은 반계가 말을 타고 나들이를 하다가 골돌히 생각에 잠긴 나머지 말이 엉뚱한 다른 길로 접어든 일도 있었고, 또 한번은 나루를 지나다가 나룻배가 엎어지는 것을 보고 점잖은 선비로서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다른 배를 불러 오고, 손수 강에 뛰어들어 9명의 인명을 구한 적도 있다 한다. 손수 일을 한 것은 아니지만 농촌 현실에 몸을 담고 현실에 입각한 개혁을 부르짖었고, 비록 벼슬은 진사에 머물러 당시는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어느 왕후장상을 뵙는 것 보다 정겹다.


혈죽이 되어 자라난 충절, 민영환

대마도를 정복한 장군, 이종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