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회(韓明澮, 1415∼1487)는 본관이 청주(淸州)이며, 자(字)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사우당(四友堂)이다. 예문관 제학(提學)을 지낸 상질(尙質)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기(起)이다. 어머니는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이적의 딸로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불우한 시절을 보냈다.
  「비서(碑嶼)」에 전하는 말로 압구정은 일곱 달만에 세상에 태어났는데, 처음에는 사지를 갖추지 못하였다 한다. 늙은 여종이 떨어진 헌 옷에 싸두었는데, 몇 달 후에나 형체가 이루어졌고, 등과 배에 천태·북두성같은 검은 사마귀가 있어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한다. 30세가 넘도록 한가한 생활을 하였으나 증조부 상덕(尙德)은 오히려,
  "우리 집안의 천리마다."
라고 칭찬하였다. 어릴 때 절에서 공부하였는데, 하루는 어두운 밤에 산길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호랑이 한마리가 나타나 산길을 옹호하므로 그가 말하기를,
  "서로 멀리 보내왔으니 족이 후의를 알았노라."
라고 하니 그 호랑이는 머리를 조아리고 끓어 엎드리는 시늉을 하다가 날이 밝아지자 갔다 한다. 압구정은 어린 시절에 권남(權擥)과 생사의 벗이 되기로 맹세하고, 그와 더불어 산수를 떠돌며 해가 바뀌어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훗날 권람의 천거로 압구정은 청사(靑史)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지만, 권람은 압구정을 가르켜,
  "문장과 도덕은 내가 물론 그대에게 대적할 수 없지만 사업을 경륜하는 데는 내가 어찌 많이 양보할소냐."
하며 희롱하였다. 또한 장가 든 가장이 집은 돌보지 않고 방랑 생활만 하자 장모는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장인인 민대생(閔大生)은 오히려 부인에게 이르기를,
  "사위는 큰 뜻을 품은 자이니 나중에 반드시 크게 될 것이다. 다른 사위 대접하듯 하지 마시오."
라고 하였다. 일찍이 압구정이 산수를 떠돌며 영통사(靈通寺)에서 놀 때 생김새가 괴상한 노승이 있었다. 그는 보고 말하길,
   "공의 머리 위에 광채가 번쩍번쩍하니 모두 귀한 징조이니, 명년을 지내지 않고 반드시 큰 뜻을 이루리라."
하였다. 압구정은 명석한 두뇌로 처세에는 능하였지만, 과거 운은 없었던지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모두 낙방하였다. 급기야는 38세(1452)에 과거를 보지 않고 부모공에 의하여 송도(松都) 경덕궁의 하급 관리에 임명되었다. 다른 사람같으면 세상을 호령할 나이에 말단 벼슬길에 오른 압구정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대동기문」에는 이 때의 푸대접 받은 기록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어느날 날씨가 좋을 때 경덕궁 관리들이 만월대(滿月臺)에서 계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은 집은 서울에 있지만 타향에 나와 벼슬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술과 자리가 마련되자 압구정도 그 자리에 참석을 하였으나 계원들이 합석을 허락치 않았다. 다음 해 세조가 등극하는데 공을 세워 일등공신에 책봉되고 또한 임금의 장인이 되니, 그 때의 계원들은 모두 크게 후회하였다 한다.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왕에 오르자 김종서 등 원로 대신들은 왕을 보위하며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일찍이 왕에 오를 야심을 품은 수양대군은 은밀히 사람을 구하자, 교리(校理) 권남은 압구정을 추천하였다. 추천에 의해 한명회가 복건을 쓰고 수양대군을 처음 만나자, 그들은 한번 보고도 구면과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되었고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였다. 어찌나 둘이 잘 통하였는지, 한명회가 수양대군의 거처를 방문할 때면 종친부 관원이라 칭하기도 하고, 의원이라고도 하며 그 출입에 의심을 없게 하였다. 또한 어두운 밤에는 소리를 내기 곤란하자 노끈을 궁의 종 임운(林芸)의 팔에 묶어 그 끝을 문 밖에 드리우고 있다가, 그 것을 당기면 비록 밤이 깊어도 거처로 들어가 정난(靖難)의 계책을 상의하였다 한다.

  압구정은 수양대군과 왕위를 찬탈할 계책을 세우면서 그 실행을 위해 무사 홍달손(洪達孫) 등 30명을 추천하여 심복으로 삼았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수양대군은 단종 원년(1453)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카 단종 대신 왕권을 차지하였다. 이 때 압구정은 참모로 공을 인정받아 군기녹사(軍器錄事)가 되었고 정난공신 1등에 책봉되었다. 그 후 병조의 관할기관인 사복시(司僕寺) 소윤(少尹)을 거쳐 이듬해에 동부승지가 되었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그 해 가을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으로 우승지가 되었다. 이후 한명회는 탄탄대로의 벼슬길을 걸었는데, 1456년(세조2)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좌절시킨 뒤 좌승지를 거쳐 승정원의 으뜸벼슬인 도승지(정3품)에 올랐고, 1457년에는 이조 판서에 올라 상당군(上黨君)에 봉하여 졌다.

  1459년에는 황해도·평안도·함길도·강원도에서 군란이 있자, 왕 대신 일반 군무를 총괄하는 체찰사(體察使)를 지냈다. 1461년 상당부원군에 진봉되었고, 1462년 우의정, 1463년 좌의정을 거쳐 1466년 영의정에 올랐다. 한명회는 자기를 키워준 권람(權擥)·신숙주(申叔舟) 등과 인척 관계를 맺고, 세조가 나라를 다스리는데 일급 참모로 기여하였다.
  권남의 집에는 젊은 여종이 있었는데, 태도와 얼굴이 빼어나 권남은 늘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부인이 무서워 어찌하지 못하고 애간장만 태우자, 하루는 상당군 압구정이 눈치를 채고,
  "상심병으로 앓은 것처럼 거짓 흉내를 내자."
라고 하였다. 그날 밤 압구정은 권남의 사랑채에 몰래 들어와 회화나무 꽃을 삶은 물을 전해주며, 온 몸에 바르게 하여 황달병같은 증상을 만들었다. 며칠 후 압구정은 울며 말하기를,
  "내 벗이 죽겠구나. 맥박이 느리고 기운이 이렇게 약해서야 조석간에 곧 쓰러지겠다. 부인은 어찌 한 계집을 아껴 주인의 목숨을 살리지 않습니까."
하니, 부인이 알아 차리고 곧 여종을 남편에게 보내주었다 한다. 이처럼 압구정은 계략이 뛰어 났다.

  1466년 함경도에서 이시애(李施愛)가 난을 일으켜서 한명회·신숙주와 내통했다고 소문을 퍼뜨리니 압구정은 대궐에 구속되고, 아들과 사위 모두 금부에 가두어 달포가 되도록 풀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난이 평정되어 모든 협의가 풀리자 세조는 크게 후회하며, 이시애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신(申)·한(韓)무리가 있으면 일을 성공하지 못할까 두려워 그리 했노라."
라고 하였다. 압구정이 비밀리에 정무를 도왔으므로 세조는 그를 가리켜 중국 한(漢)나라의 고조를 도와 항우를 물리치고 나라를 세운 모사 장자방(張子房)에 비유할 정도였다. 이처럼 신임을 얻은 압구정은 1468년 세조가 죽으면서 유언(遺敎)으로 원상(院相)에 봉하기를 원해서 그 직책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 벼슬은 왕이 죽은 뒤 석달 후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에 제삿 지낼때까지 정무를 행하는 임시벼슬이었다.

  1468년 압구정은 남이 장군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에 책록되어 다시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또한 2대에 걸쳐 국구(國舅)가 되었는데 첫딸은 예종에게 시집 보냈으나(장순왕후) 17살에 죽었고, 다시 성종의 비로 둘째 딸을 시집 보냈으나(공혜왕후) 역시 18살에 죽었다. 공혜왕후 입장에서 보면 언니가 시어머니인 격이니 얼마나 압구정이 권력에 집착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성종이 집권하자 압구정은 정자 압구정에서 중국 사신을 접대하며 용봉 차일로 햇볕을 가릴 수 있도록 청하였으나, 성종이 허락치 않자 얼굴을 붉히고 일어났다. 이 일을 두고 대간(臺諫)이 죄를 자처하며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그 후로 압구정은 「세조실록」 편찬에 관여하였고, 서적이 부족한 성균관에 경사(經史)관계의 서적을 많이 비치토록 조치한 일도 있었다.

  1484년 70세에 이른 압구정은 임금으로부터 궤장(机杖)을 하사받았다. 이것은 정2품 이상의 벼슬아치로 나라에 큰 공이 있는 사람이 70세에 이르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지고, 이 때 임금은 궤장을 하사하였다. 갖은 영화와 부귀를 누린 그도 세월은 어찌 할 수 없는지 7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아울러 충성(忠成)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가 죽자 그로 인해 억울한 일을 당하였던 사람들의 모함이 줄을 이었다. 급기야는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 때, 연산군 생모 윤씨가 사약을 먹고 죽은 일과 관계가 있었다 하여 무덤을 파 관을 쪼개고, 시신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剖棺斬屍)형을 당하였다.

  기심(機心)이 가득찬 압구정
  압구정은 벼슬밭에서 평생 영화를 누리고 살면서도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며 산 욕심 없는 사람이란 이름을 듣고 싶어, 지금 강남의 압구정에 정자를 지었다. 정자는 한남대교와 영동대교 사이 뚝섬쪽 강의 벼랑과 여울이 있는 돌출한 곳에 지었다. 자신을 중국 송나라 때 임금이 권좌에 오를 수 있도록 공을 세운 한충헌(韓忠獻)에 비유하며 그의 정자명이 압구정인 것을 흉내내어 자신의 정자 이름도 명나라 한림학사인 예겸(倪謙)에게 청해 '압구정'이라 하고, 호(號)로도 삼았다.
  '압구(狎鷗)'란 '갈매기와 친하게 지낸다'는 뜻으로 그는 명나라의 사신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 때만 이 정자를 사용하였고, 유유자적하게 자연을 즐기기 위하여 이 정자를 찾은 적은 없었다. 연회를 열 때 그는 심지어 궁중에서만 사용하는 용봉(龍鳳) 차일을 치고 호사를 구가하다가 성종의 미움을 산 일까지 있었으니, 압구정의 기심을 아는 갈매기가 찾아올 리 없었다. 압구정은 스스로 '기심을 잃은 노인'이란 뜻으로 자기를 '망기로(忘機老)'라 불렀는데, 갈매기가 성질이 고약하고 재물을 탐하는 그를 모를 리 없었다.

  옛날 바닷가에 한 어부가 살았는데, 바다로 고기를 잡으러 나가면 갈매기가 날아와 어깨에 앉기도 하고, 다가가도 날아가지도 않는 등 전혀 그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내는 욕심이 생겨 그에게 갈매기를 한 마리 잡아오라고 시켰다. 그는 의기양양하여 다음 날 갈매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다. 그러나 그 날 따라 갈매기는 어부 근처에 오지 않고, 주위만 빙빙 맴돌 뿐이었다. 이상하게 여긴 어부는 '저 새는 사람의 마음을 알아보는 새로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정자를 짓고 연회를 베풀자 임금이 글을 지어 하사하였고, 이어 문사(文士)들이 줄지어 화답하니, 시가 백 편이 넘게 압구정 처마 밑을 장식하였다. 최경지(崔敬止)라는 사람도 시를 지어 받쳤는데, 내용이 매우 경고적이라 압구정은 그 시를 정자에 걸지 않았다 한다.

  하루에도 3번이나 접견하시는 은총이 두터우니 (三接殷勤寵渥優)
  정자가 있어도 와서 놀 만한 겨를이 없네 (有亭無計得來游)
  흉중에 스스로 기회만 엿보는 마음만 조용하다면 (胸中自有機心靜)
  벼슬길에서도 가히 갈매기와 친할 수 있으리 (宦海前頭可狎鷗)

  잡초가 우거진 유택
  압구정의 유택은 병천에서 593번 도로를 따라 가다 경부고속도로 밑을 지나서 바로 마을 길로 좌회전한 다음 다시 고속도로 밑으로 난 좁은 길을 지나면 낮은 앞산이 가로 막고 있는데, 이 산 중턱에 있다. 올라가는 산길은 큰 밤나무에 풀이 우거져 길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 길 없는 산길을 100m쯤 올라가면 잡초가 무성한 평평한 곳에 신도비가 있고, 묘는 바로 오른편 윗쪽에 있다.(근래에 대대적인 정비사업을 벌려 사당을 세우고 잡목도 모두 제거함)
  길 위의 비탈에 있는 신도비는 흉칙스럽게 훼손되어 있다. 비신(碑身)을 받친 귀부(龜趺)와 비신 위의 이수는 모습이 분명한데, 비신에 새겨진 비문(碑文)은 누군가 그라인더(grinder)로 힘껏 갈아 도저히 글자를 알아 볼 수 없다. 비문은 두전(頭篆)에 약간 남아 있는데, 그것도 '忠成公'만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여서 겨우 옆의 묘가 압구정의 것임을 알려 줄 뿐이다.

  당대에는 절대적 위세를 떨쳤으나 그 권세만큼이나 원한도 많이 사 사후에는 신도비조차도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누군가의 손에 의해 망가져 나뒹굴고 있으니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신도비에서 묘로 향하는 길엔 잡초가 한 길은 넘고, 봉분이며 비석을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묘 주위는 장대석으로 네모지고 낮게 곡장을 대신하였는데, 돌에는 이끼가 끼어 음산한 분위기가 풍긴다. 압구정의 묘는 합장이 아닌 쌍분인데, 부인묘는 옆이 아닌 뒷쪽에 두었다. 부인 묘비(墓碑)에는 '黃驪夫人閔氏之墓. 弘治四年三月'이라 쓰인 것으로 보아 부인이 뒤에 세상을 떠나 윗쪽에 모신 것 같다.

  잡초가 우거진 압구정묘는 풀에 가리어 주위를 돌아보기조차 어렵고, 묘 앞 장명등의 지대석은 잡초와 흙에 덮여 보이지 않고, 간주석은 잘록한 사각형 모습을 띄고 있다. 화사석(火舍石)은 사각으로 앞 뒤로만 창이 나 있고, 옥개석은 투박스럽고 거칠어 전체 모양이 조화스럽지 못하다. 압구정의 묘를 내려 오며 권력과 영화란 덧없는 것임을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되새겨 보게된다. 전하는 말로 압구정은 어찌나 성품이 모질었는지 늙어서 다리가 쑤시고 아프자 종을 시켜 도끼로 다리를 자르라고 하였다. 종이 무서워 떨자 그는 호통을 치며 직접 다리를 잘랐는데, 그 속에서 벌레가 나왔다. 그러자 그는 벌레를 손으로 잡아 이빨로 지근지근 씹으며, "거 시원하다." 라고 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