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제희의 풍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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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물로서의 숲

[숲이 희망이다 30]유물로서의 숲




유물(遺物)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과거의 인류가 남긴 유형의 제작품’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유물하면 흔히 낡고 고정된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되는데, 이와 달리 살아 있는 데다가 매년 조금씩 변화하는 유물이 있다. 과거 인간이 심고 잘 가꾼 숲이 바로 그것이다.


친근한 마을숲에서부터 법으로 지정하여 보호하는 천연기념물까지 우리에게 남겨진 소중한 숲은 많다. 그렇지만 정작 ‘유물로서의 숲’을 대표할 만한 나라숲 봉산(封山)은 우리의 머리 속에서 사라졌다. 지금까지 교과서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용어라 다소 어색하겠지만, 조선시대 중기 나라가 특별히 지정하여 관리하는 숲을 일컫는 말로, 봉산은 지금의 국유림처럼 당시에는 폭넓게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의 산림정책은 한마디로 소나무정책이고, 조선후기 소나무정책의 핵심은 봉산제도라고 요약할 수 있다. 소나무에 대한 남다른 관심은 주자학 중심의 성리학을 신봉하였던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사고와 깊은 관련이 있다. 사대부들은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까지도 모두 지켜야 할 안정된 질서가 있다고 믿었다. 인간사회는 왕을 기점으로 하여 사대부, 천민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처한 자리가 있고 산은 백두산을 어른으로 하여 질서가 부여되었으며 나무 역시 소나무를 으뜸으로 생각하였다.


사대부가 모든 나무의 으뜸으로 소나무를 인식한 이유는 겨울에도 푸른 잎을 달고 모진 추위를 견뎌내는 소나무의 모습 속에서 선비가 지녀야 할 지조, 의리를 느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소나무를 닮고 싶었고, 그런 까닭에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마당에 소나무를 심어 항상 곁에 두고 살았으며 죽어서도 소나무관에 묻혔던 것이다. 조선시대 집권층을 형성하였던 사대부들은 이러한 유교적 관념성을 바탕으로 소나무를 자신들과 동일시하였다. 이러한 사고는 사람이 거주하는 집과 죽은 사람의 안식처인 관을 만드는 자재로 소나무를 주로 이용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그렇다면 조선 중기 숙종은 왜 봉산을 지정하였을까? 17세기 후반의 조선 사회는 백성과 정부 모두에게 매우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백성들의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나라는 관리들에게 줄 봉급조차 부족하였다. 왕의 친척과 관리들에게 일시적으로 지급하였던 산림은 개인이 산을 소유하는 빌미로 이용되었고, 결국 조선시대 근본 법전인 경국대전의 반포와 함께 이어져 온 ‘산림은 사사로이 소유할 수 없다’는 원칙을 정부 스스로가 어기는 꼴이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권세가들의 산림 점유는 점차 확대되어 정작 나라를 위해 쓸 좋은 소나무숲조차 부족하게 되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나라가 선택한 제도가 바로 봉산제도였다. 봉산제도란 궁궐을 짓고 선박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국가 용도의 소나무를 지속적으로 조달하기 위해 소나무가 잘 자라는 숲을 지정하여 관리하는 제도였다. 해안가 30리 이내의 산림을 모두 국가가 관리한다는 기존 정책을 포기하고 특정 산림을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관리하는 정책으로 전환한 것이다. 봉산으로 지정된 산림 안에서는 백성들이 나무를 베거나 농사짓고 묘를 쓰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이렇게 지정된 봉산은 대부분 물길이 편리한 해안가와 남한강, 북한강 유역에 분포하였다. 봉산을 해안가나 강유역에 지정한 이유는 목재가 무겁고 부피도 커 배가 아니고서는 쉽게 운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재정과 군정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만기요람’(1808)에 따르면 주로 배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소나무를 조달하기 위해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가, 충청도 안면도 등에 282곳의 봉산을 지정하였는데, 안면도에만 특별히 73곳의 봉산이 지정되었다. 반면 강원도와 경상북도 북부지역은 궁궐의 건축과 관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소나무를 조달하기 위해 60곳의 황장봉산(黃腸封山)을 지정하였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우량한 소나무숲을 볼 수 있는 울진군의 소광리 소나무림도 당시 지정된 황장봉산의 하나였다.


봉산의 가장 큰 역할은 궁궐을 짓고 배를 건조하는 데 쓰이는 좋은 소나무를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것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창덕궁 인정전, 수원 화성문 등 많은 목조건축문화재의 기둥, 대들보 추녀 등은 충청도 안면도, 황해도 장산곶, 전라남도 완도 등 당시의 대표적인 봉산에서 키운 나무로 지어졌다. 믿겨지지 않겠지만 18세기 후반 수원성의 기둥이나 대들보로 사용된 대부등(大不等) 344주는 안면도 봉산에서 생산된 소나무였다.


대부등은 길이가 9m, 원목의 양 끝 중 좁은 곳의 지름이 67㎝나 되는 큰 나무였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부피 단위로 계산하면 약 4㎥의 나무인데, 서 있는 나무라고 생각하면 대략 길이가 25m, 가슴둘레 지름이 80㎝의 거대한 나무를 잘라야만 하나의 대부등이 나온다. 이러한 소나무를 344주나 생산할 수 있었던 안면도 봉산을 상상해 보라.


그러나 언제부턴지 봉산이란 용어와 유물로서의 봉산은 잊혀져 갔다. 그 이유는 조선후기 대표적인 나라숲인 봉산제도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과 조선후기 이후 계속된 시련기를 겪으면서 잘 가꾸어진 본래의 봉산이 대부분 사라졌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그리고 매일 조금씩 변화하는 유물로서의 봉산은 이제 울진 소광리 소나무숲, 안면도 승언리 소나무숲 등 손에 꼽을 만큼 줄어들었다.


봉산은 그렇게 잊혀졌지만 변화하는 유물로서의 숲은 계속 자라고 있다. 1920년대 심고 가꾼 대관령 소나무숲, 1950년대 조성한 장성 편백나무숲은 세월이 흘러 당대의 귀중한 유물이 되었다. 유물이 과거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우리가 지금 심고 잘 가꾼 숲 역시 미래의 우리 후손들에겐 소중한 유물이 될 수 있다. 역사는 반성을 딛고 새로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경향신문 게재]

음악 속의 나무와 숲

인격이 부여된 나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