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제희의 풍수칼럼
목록으로
  구도 장원 이 율곡

  이이(李珥, 1536∼1584)는 조선 유학에 있어 퇴계(退溪)와 쌍벽을 이루며 성리학을 이끌었던 대학자로서, 본관은 덕수(德水:현재 경기도 개풍군)이고,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이다.
  36세의 부친 원수(元秀)와 33세의 모친 신사임당(申師任堂) 사이에서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율곡은 13세(1548)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29세(1564)가 되던 7월에 생원·진사에 오르고, 그해 8월에 명경과에 급제하여 호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그 후 율곡은 역사상 최초로 구도장원(九度壯元:아홉 번 일등으로 과거에 합격함)을 하면서 30세에 예조 좌랑, 31세에 사간원의 정언(正言)에 임명되어 어지러운 관계(官界)의 행습을 바로잡는 데 힘썼다.

  또한 33세에 사헌부 지평(持平), 다음해에는 홍문관 교리(校理)에 임명되어저 유명한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올렸다. 그러나 율곡은 천부적으로 약질이어서 건강을 회복하고자 관직을 사퇴하고 황해도 해주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이때 율곡은 그 곳의 경치를 읊은 '고산구곡가(高山九谷歌)' 등 많은 시를 지었고, 병이 나아지자 36세에 청주목사에 임명되었다. 청주목사로 재임시에 백성의 교화를 위하여 향약(鄕約)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실천하게 하였으나, 다음해 또 다시 병으로 관직을 사퇴하고 이 곳 파주 율곡리에 머물렀다. 이처럼 병으로 인하여 관직 임명과 사퇴를 반복하며 사헌부 대사헌, 호조 판서, 이조 판서, 형조 판서를 역임하였고,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東人)들의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다가, 말년에는 이조 판서를 지냈다. 49세가 되던 1월, 인사동 자택에서 별세하여 이곳 자운산 기슭에 묻히었다. 그후 40년이 지난 인조(仁祖) 2년(1624)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태몽으로 용을 보아 아명(兒名)을 현룡(見龍)이라 하였다. 모친이 꿈을 꾸었는데, 한 마귀가 나타나 '이 아이는 큰 인물이 될 것이니 죽여 버리겠다'고 하였다. 다만 오죽헌 뒷산에는 밤나무가 많은데 그 나무의 수가 천 그루가 되면 하늘의 뜻이니 살려 주겠다고 하였다. 이에 모친과 마귀는 뒷산에 올라 밤나무를 세었는데 999그루였다. 마귀는 회심의 미소를 띄며 뱃속의 아이를 떼려고 하자 밤나무 옆에 있던 한 나무가 '나도 밤나무다' 라고 외쳐 마귀가 도망갔다고 하며, 현재 이 나무를 세상에서는 '너도 밤나무'라 부른다.

  아무튼 명문의 혈통을 이어 받은 율곡은 총명하여 여느 아이들과는 크게 달라 3∼4세에 글을 깨우쳤으며, 특히 3세 때에는 석류를 가지고 놀다가 '석류피리쇄홍주(石榴皮裏碎紅珠)'라는 고시(古詩)를 지을 정도로 뛰어났다. 8세에 지은 '화석정(花石亭)' 시는 시율(詩律)에 능한 뭇 사람을 압도하고도 남는 걸작이다.
  16세(1551년) 되던 해에 모친인 신사임당(申師任堂)이 별세하자, 3년 동안 무덤 앞에 여막을 짓고 조석으로 예를 올리고, 가례(家禮)에 따라 상복을 벗지 않고 손수 제찬을 마련하였으며, 그릇을 씻는 따위의 하찮은 일도 종들에게 시키지 않는 지극한 효심을 보였다. 3년이 지나 탈상을 하고 19세가 되었으나, 율곡은 모친을 애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밤낮으로 곡을 하며 슬퍼하였다 한다.

  하루는 봉은사(奉恩寺)를 갔다가, 그곳에 있는 불경을 우연히 접하고 불교의 생사설(生死說)에 깊은 감명을 받아 금강산에 입산하였다. 그 곳에서 승려들과 두루 교류하며 불경도 공부하고 선(禪)을 행하였다. 특히 금강산의 곳곳을 두루 살피며 금강산의 사계절에 대해 느낀 바를 읊은 '풍악행(楓岳行)'이라는 장편의 시와 '만폭동(萬暴洞)' 등 10여 편의 기행시(紀行詩)는 한 구절 한 구절이 절묘하고 뛰어나 마치 한 편의 산수화를 보는 듯이 자세히 묘사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풍악행은 6백 구(句) 3천 언(言)으로 된 시로써 산문을 대적할 만한 대작으로, 금강산의 수려하고 청아한 모습과 만학천봉(萬壑千峯)을 벗삼으며 그 속에서 거닐던 작가의 고매한 인격이 넉넉히 배어 있다.

  열녀 노씨의 묘
  율곡의 묘는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 경내에 있는데, 이 곳은 천현면 동문리로 선유리에서 316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법원리에서 '자운서원'이라 표시된 안내판을 끼고 좌회전하여 좁은 시멘트 길을 따라 가면 넓은 주차장과 함께 있다. 문성문(文成門)을 지나면 파란 이끼가 낀 돌계단이 위쪽으로 길게 나 있고 양 옆에는 노송과 참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는데, 매미는 귀가 멍할 정도로 울어 댄다. 율곡의 묘는 나무로 담장을 친 묘역의 맨 윗쪽에 모셔져 있고, 부인 노씨(盧氏)의 묘는 쌍분도 합장도 아닌 형태로 부군(夫君) 보다 조금 윗쪽에 연이어 자리 잡았다.

  자식이 벼슬이 높으면 아버지보다 윗쪽에 묘를 쓰는 것은 크게 이상할 것은 없지만 자식과 부모 간의 차례가 없고, 또한 율곡의 묘는 합장도 쌍분도 아닌 희귀한 형태이어서 의아한 생각이 든다. 율곡은 22세(1557년 9월) 때 성주목사(星州牧使)인 노경린(盧慶麟)의 따님과 결혼을 하였는데, 딸만 둘 두었고 아들은 두지 못하였다. 39세에 서자(庶子), 경림(景臨)을 두었으나, 이름이 세상에 전하지 않고, 경정(景鼎)은 양자라는 일설이 있다.

  부인 노씨의 묘가 합장도 쌍분도 아닌 연이은 형태로 되어 있는 이유에 대하여, 「경기읍지」 중 파주군 조의 열녀편(烈女編)에는, '임진왜란 때 부인 노씨는 남편인 율곡의 묘를 껴안고 있다가 왜적에게 살해당하였다. 이에 정려문을 세운다' 라고 쓰여 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8년 전에 선생이 49세로 돌아가시자 이 곳에 묘를 정하였는데, 그 후 난이 일어나자 부인은 이 곳에서 한 여종과 함께 묘를 지키고 있었다. 이때에 놈들이 겁탈하려 하자 이에 두 여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훗날 난리가 끝나고 후손들이 곳을 둘러 보니 율곡의 묘 옆에 두 여자의 유골이 흩어져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 지나 부인과 여종을 구분할 수 없었다 한다. 이에 두 유골을 모아 합장도 쌍분도 아닌 형태로 연이어서 묘를 썼다 한다. 기구한 사연이 아닐 수 없다.

  묘 앞에는 문관석(文官石)이 양쪽에 시립해 있고, 석마(石馬)가 쓸쓸히 서 있다. 율곡에게 세인(世人)이 구도 장원(九度壯元)을 할 만큼 벼슬에 그토록 집착하느냐고 묻자,
  "궁핍한 살림이라 맛난 음식으로 부모를 봉양치 못할 것이 두렵고, 또한 어버이의 간곡한 응과(應科)의 바램을 저버릴 수 없었다."
  라고 답변하여 벼슬보다는 학문에 뜻을 두었음을 헤아려 알 수 있다.
  율곡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583년(48세)에 병조 판서로 있으면서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10만 명의 군사를 양성할 것을 주장하였고, 또한 율곡리에서 은거할 때에는 화석정의 기둥에 매일 기름칠을 하여 훗날에 대비하였다 하니, 그 선견지명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율곡의 사랑
  황해도 황주(黃州)에 유지(柳枝)라는 어린 기생이 있었다. 용모도 귀엽고 마음씨 또한 고와 뭇 사내의 가슴을 태웠으나, 본인은 정작 세상 유혹에 현혹되지 않고 절개를 굳게 지켰다. 39세에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한 율곡은 34세 때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치정(治政)의 도(道)를 역설하고, 39세 때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지어 시정의 폐단을 극렬하게 상소하여 이미 그 명성이 자자하였다. 평소 율곡의 인품과 학덕을 사모하던 유지는 황주에서 해주(海州)로 넘어 와 율곡의 수청을 들었다.

  그러나 엄한 어머니 가르침에 몸가짐을 바로 한 율곡은 안방에 들어 갈 때도 의관을 정제한 뒤 들어갔고, 또한 몸도 허약하여, 유지의 몸을 범하는 살수청은 요구하지 않았다. 얼마간의 세월이 흘러도 동기(童妓)인 유지의 머리를 얹어주지 않자, 시정잡배들은 너도나도 유지의 머리를 올려 주겠다고 아우성이었다. 유혹이 거세어지자 유지는 율곡에게 간청을 하였다. 학식도 풍부하고 고매한 인품을 소지한 율곡에게 성인지례(成人之禮)를 받았으나, 율곡은 차마 몸은 범하지 못하고 축하하는 시를 지어 주었다.

  어린 몸 수줍은 듯 고개 숙여 (弱質羞低首)
  추파를 던져도 대답이 없네 (秋波不肯回)
  마음은 부질없이 설례이건만 (空聞波濤曲)
  운우의 정은 풀지 못 하였오 (未夢雲雨臺)

  너는 자라면 이름을 떨칠 것이나 (爾長名應擅)
  나는 이미 늙음 길에 들어섰네 (吾衰閤已開)
  미인에게는 임자가 따로 없으니 (國香無定主)
  영락없이 가엾겠구나 (零落可憐哉)

  나이 고작 40인데도 본인이 늘었다고 말한 이유는 평소 병치례가 잦았던 탓도 있었지만, 어려서 꾼 꿈을 기억하였기 때문이다. 전하는 이야기로 열병에 걸린 율곡이 사경을 헤메어, 저승에 다다랐다. 그러나 염라국의 수문장은 염마장(閻魔帳)에 이름이 없다며 돌려 보냈다. 이 때 돌아가는 율곡에게 시를 한 수 지어 주었는데,

  사향노루가 봄산을 지나니 풀이 절로 향기롭다 (麝過春山草自香)

  사향노루의 배꼽은 귀한 약제인데, 늦은 봄 십여일만 향기를 내뿜는다. 사향노루에 율곡을 비유하였으니, 짧은 수명에 큰 이름을 빛낼 것을 예언한 것이다. 2년 간의 관찰사 임기가 끝나자 율곡은 벼슬을 버리고, 해주에 있는 석담(石潭)으로 가 후학도 양성하고 '성학집요(聖學輯要)'도 저술하였다. 비록 어린 유지에게 깊은 정은 주지 않았지만, 유지는 율곡만을 생각하며 굳게 지조를 지켰다. 유수같은 세월은 무정히도 흘러 유지가 24세가 되던 해, 율곡은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해주에 오게 되었다. 꿈에도 그리던 낭군이었으나, 공무에 바빠 하룻 밤만 지내니, 유지의 마음은 기쁘기보다는 차라리 고통이었다. 밤새 흐느끼며 회포를 풀었으나, 이 때도 서로 몸을 범하지 않았다. 떠나야 할 낭군과의 하룻 밤은 어찌 그리 짧은지..... 두손을 잡고 밤을 새운 두 사람은 이윽고 헤어질 시간이 되자, 필묵으로 이별을 아쉬워 하였다.

  타고 난 자태 선녀인 양 침착하고 고상하여 (天姿綽約一仙娥)
  서로 알기 십년에 마음 움직임도 많았네 (十載相知意態多)
  내 본시 목석같은 사내는 아니나 (不是吳兒腸木石)
  병의로 쇠약하여 화려한 꾸밈을 사양했을 뿐이네 (只緣衰病謝芬華)

  누구에게나 이별은 슬픈 일이다. 너무도 오랫동안 꿈에서나 그렸던 낭군을 하룻 밤에 보내는 유지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훗날 석담으로 다시 오겠다고 한 율곡은 그 후 이조·형조·병조판서를 지내면서 '만언소(萬言疎)'와 시국정책을 개진하다 유지와의 약속을 저버린 채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해주에서 부음을 들은 유지는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에 두문불출한 채 3년 상을 치루었다. 상을 치룬 유지는 그 후 머리를 깍고 구월산에 들어가 영영 자취를 감추었다.(율곡이 유지에게 보낸 〈친필연서〉가 이화여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음)




뿌리째 뽑힌 꽃나무, 이시백

현모양처의 귀감, 신사임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