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의 들녘은 언제나 풍요가 넘친다. 앞에는 높은 산이 있어 푸르고, 들녘엔 벼와 곡식이 익어간다.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에는 온갖 해산물이 풍부하고 밭에서는 인삼이 자란다. 문장가 이규보(李奎報) 선생의 묘와 사당은 길상면 길직리에 있다. 301번 국도를 따라 강화읍으로 가다가 도로를 가로질러 좌화전하면 시멘트 길이 잘 포장되어 있고, 조금 가다가 우회전하면 앞쪽으로 사당과 묘가 한 눈에 들어온다.



   사가(四可)의 풍요

   백운거사(白雲居士)은 개성에서 전원 생활을 즐기면서 개성은 네 가지가 만족스러우니 살만하다고 하였다. 네 가지가 만족하다는 4가(四可)란 첫째, 농토가 있어 가히 양식을 공급할 수 있고. 둘째, 뽕밭이 있어 누에를 쳐서 옷을 지을 수 있고. 셋째, 샘물이 있어 가히 마실 수 있고. 넷째, 나무 숲이 있어 가히 땔감을 조달할 수 있어 살만한 곳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백운거사는 문장가이며 또한 재상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청렴 결백하고 맑은 성품으로 일생을 마친 분이다. 평생을 고향인 여주에 돌아가 전원 생활을 하며 지내길 원하였지만, 몽고의 침입으로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쓸쓸히 이 곳에 묻히게 되었다. 그 뒤 고려가 다시 개성으로 돌아가자 그 자손 또한 이 곳을 떠나 훗날에는 묘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하였다. 수백 년을 두고 까맣게 잊었던 백운거사의 묘는 그 후손과 정부의 지원하에 다시 찾게 되었고, 1967년 사당을 세우고 묘역을 정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어귀에는 늙어 굽어진 반송이 가지를 뻗어 객을 맞으니 운치가 있다.



   민족의 시인 백운거사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본관은 여주(驪興)이고, 자(字)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이다. 호부 시랑(戶部侍郞)을 지낸 윤수(允綏)의 아들로 태어나 9세에 중국의 고전을 두루 읽고, 14세 때에는 과거 시험을 대비한 예비 시험에서 시(詩)를 가장 빨리 지어 선배로 부터 기재(奇才)라는 소리와 함께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로 추앙받았다. 태어나 29세에 이르기까지 백운거사는 포악한 무신 정권의 지배하에서 갖은 고난을 겪으며 자라났다. 시문(詩文)에서 재능을 보인 백운거사는 장차 문장으로 이름을 날려 입신 출세하려는 야망을 가졌다. 형식에 치우친 과거 시험 공부는 소인배나 하는 하찮은 글로 여기고 자신은 중국의 여러 문헌을 두루 섭렵하며 폭 넓은 학문을 쌓았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무신이 정권을 장악하고 문신이 조정에 발을 들여 놓을 기회가 없는 암울한 시절에는 하나의 꿈이었다. 과거 시험인 사마시(司馬試)에 연속으로 낙방한 백운거사는 16세부터 초야에 묻히어 시와 풍류를 읊는 은자들과 4～5년간 교류를 하였고, 특히 그는 오세재(吳世才)라는 은사를 깊이 존경하여 인간적인 공감을 나누며 어지러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였다. 1189년(명종 19) 유공권(柳公權)이 좌수(座首)가 되어 실시한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백운거사는 이듬해 예부시에서 동진사(同進士)로 합격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과거에 의한 정상적인 벼슬보다는 이의민(李義旼)이라는 절대권력자 마음대로 정권을 유린하던 때라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였다.

    꿈이 꺾인 백운거사는 장자(莊子)가 말한 ‘세상의 번거로움이 없는 허무자연의 땅’을 동경하며 개경의 천마산(天磨山)에 들어가 시문을 지으며 세상을 관조하였다. 백운거사라는 호도 그 때 지은 것이며, 유유자적하며 세상이 평온하기를 기다렸으나 끝내 그런 세상은 오지 않았다. 26세 때 개경에 돌아온 그에게 닥쳐온 것은 고통스러운 가난이었다. 수년간 관직 없이 생활하다보니 집안은 기울고, 나라는 부패와 무능, 그리고 관리의 방탕함으로 농민의 반란이 잇달아 무엇하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뛰어난 문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를 인정하여 관리로 써주지 않으니 가사에 보탬이 되지 않았고, 벗들과 교류를 하다보니 절망만 커졌다. 훗날 ‘해동의 공자(海東孔子)’니 ‘동방(東方)의 시성(詩聖)’이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로 문재(文才)가 뛰어났던 그 이지만, 이 때부터 양면적인 인생을 걷게 된다. 하나는 호구지책과 자기 문장을 마음대로 펼치기 위하여 무신에게 머리를 굽히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는 집필에 몰두하는 일이었다.

   먼저 백운거사는 어릴 때부터 문학에 조예가 깊었는데도 30이 되도록 불우하게 지냄을 통탄하고, 일개 지방 관리라도 좋으니 벼슬길로 나갈 수 있게 하여 달라고 이제 막 정권을 잡은 최충헌 정권의 요직자에게 간절히 부탁을 하였다. 그런 그의 꿈은 32세가 되어 최충헌이 연 시회(詩會)에서 그를 국가적 대공로자로 칭송하는 시 한 수를 읊고 비로소 이루어졌다. 이 때 그가 벼슬을 얻은 시의 내용은 ‘우리 나라의 명필로는 최충헌(崔忠獻)이 으뜸이요, 탄연(坦然)이 둘째요, 유신(柳紳)이 세째다.’라는 글을 썼다. 조선의 문장가 서거정(徐居正)은 그가 찬한 「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 ‘우리 나라의 명필로는 김생(金生)이 으뜸이고, 다음은 요학사(姚學士) 극일(克一)과 탄연(坦然)이다.’라고 하였다. 권력자에게 아첨을 하고 그가 처음 얻은 벼슬은 사록 겸 장서기(司錄兼掌書記)로 전주목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봉록도 적고 행정 잡무도 번거로웠으며, 또한 동료들이 백운거사를 비방하는 바람에 생활은 고통 자체였고, 급기야는 동료의 비방에 의하여 1년 조금 지나 면직 당하고 말았다. 아첨을 하고 벼슬을 얻은 그를 곱게 볼 리가 없고, 동료와 세상의 비웃음이 커지자 그는,

인간 세상 비방하는 소리 떠드는 소리 피하노라 (爲避人間謗議騰)
문 닫고 높이 누워 자니 머리마저 흩어졌네 (杜門高臥髮鬅鬊)
처음은 방탕한 계집 생각하는 사내같더니 (初如蕩蕩懷春女)
점차로 고요하게 도 닦는 중을 닮아가네 (漸作寥寥結夏僧)
아이가 옷을 당기며 재롱떠는 것 족히 즐겁고 (兒戱牽衣聊足樂)
찾아온 손 문을 두드려도 대답조차 할 것 없네 (客來敲戶不須譍)
가난과 영욕은 모두 하늘의 뜻이거늘 (窮通榮辱皆天賦)
어찌타 굴뚝새가 대붕(大鵬)을 부러워하리 (斥鷃何會羡大鵬)

라고 하였으니, 한마디로 세상의 비방에 귀를 닫고 살겠다는 뜻이다. 벼슬에서 물러난 백운거사는 자원하여 경주 등지에서 일어난 농민 반란을 진압하는 수제원(修製員)으로 종군하여 현지에서 각종 제문(祭文)․격문(檄文), 그리고 건의문(建議文) 등을 지었다. 1207년 최충헌을 만족시킨 글을 지어 직한림(直翰林) 벼슬을 얻었고, 1215년에는 종8품의 참판(參判)이 되어 이 때부터 관리로서 편안한 생활을 즐기며 행복감에 젖을 수 있었다. 이 때에 읊은 시는 다분히 풍요롭고 풍류가 배어 있다.

<우물안의 달을 읊음 (詠井中月) >
스님이 달빛을 탐해 (山僧貪月色)
병 속에 물과 달을 함께 길었네 (幷汲一甁中)
절로 돌아와 비로서 깨달았으리 (到寺方應覺)
병이 기울자 달도 따라 공인 것을 (甁傾月亦空)

   편안하였던 관리 생활도 1217년 최충헌을 비방하였다는 부하의 무고와 집무상 과오로 또 다시 면직되자, 백운거사는 왕조적 규범에 입각한 직무수행은 권력 앞에서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백운거사는 1919년 최충헌이 죽고 최우가 집권하자 최우의 권력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며 그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탁월한 문장으로 역어 내 그로부터 약 10년간 순조로운 벼슬길을 걸었고, 이윽고 벼슬이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르러 65세가 되어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특히 주목할 것은 살아생전 최우에 의하여 백운거사가 남긴 시가 문집으로 발간되어 문필로 이름을 날리고, 관리로서 명성을 얻은 일을 후세에 오래 전할 수 있게 된 일이다. 물론 문집에 수록된 대부분의 시는 최우를 찬양하고 그 은혜에 대하여 감사함을 나타내는 시였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겠다.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운 동명왕편(東明王篇)

   한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라는 시문집이 그의 아들 함(函)에 의하여 1241년 53권 13책이 간행되어 그의 탁월한 문장과 시가 후세에 전하게 되었다. 제3권에 수록된 동명왕편은 장편의 민족 대서사시로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태어난 경위를 상세히 밝히고 있다. 즉 해모수가 유화를 만나 주몽을 낳고, 그 후 시련을 이기고 고구려를 세우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그 내용을 자세히 적음으로, 고구려의 정기를 받은 고려 왕조 창건을 유화하고, 또한 우리 나라가 독자적인 민족혼을 가진 자주적 나라임을 주장하였다. 특히 삼국시대 뿐 아니라 고려조 그리고 중국의 시에 이르기까지 탁월한 식견으로 비평한 시화집(詩話集), 「백운소설(白雲小說)」은 시에 대한 백운거사의 탁월한 비평과 함께 시를 짓는 길잡이 노릇을 하였다. 이처럼 많은 시와 문장은 대부분 출세를 위해 지어진 것이었으나, 어느 이권에도 개입하지 않고 오로지 글을 좋아하는 관리로 사심 없이 고유의 문명(文名)을 크게 떨치고자 하였던 명예심에서 비롯된 것이니, 비록 최씨 정권 아래 문한직(文翰職) 관리의 전형이었다 하더라도 백운거사가 남긴 업적은 해가 갈 수록 빛이 난다. 만년에는 시․거문고․술을 좋아하여 삼혹선생(三酷先生)으로 하였는데, 청렴하고 분수를 알아 굶주리지 않고 글을 지을 수만 있으면 만족하게 여겼다.



   백운거사의 유택과 사가재(四可齋)

   묘 아래쪽 입구에는 신도비와 ‘백운 이규보 선생 문학비’ 와 ‘묘역 정비기념비’가 이 쪽 저 쪽에 세워져 있으니 얼마나 이 곳을 정화하기 위하여 애썼는지를 알 수 있다. 750년이나 된 묘 앞 비석에는 ‘高麗 李相國 文順公 河陰伯 奎報之墓’라 쓰여 있고, 망주석 두 개와 묘 중앙에 장명등이 서 있다. 근래에 정비한 봉분 아랫쪽은 둥근 호석을 쌓았고, 예전의 비석과 상석은 묘 오른쪽으로 치워지고 근래의 것들이 자리를 잡았다. 묘 아래에는 백운거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사가재(四可齋)가 있다. 이 사당은 백운재(白雲齋)라는 현판이 있어 백운재라고도 하는데, 그 안에는 사가재를 지은 기(記)가국한문 혼용체로 걸려 있다. 백운거사의 묘와 사당은 입구에 있는 노송 6～7그루와 한데 어울려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