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제희의 풍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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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무를 겸비한 명인, 신숙주


    의정부에서 43번 국도를 따라 남양주군으로 가다보면 교도소가 있다. 교도소 앞에는 고산동으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있고, 입구에 ‘保閑齋先生墓所’라 쓴 푯돌이 서 있다. 마을 길로 들어가면 가게가 있고, 그 곳에서 우회전하면 산 중턱에 묘와 석물이 보인다.


    한글 창제에 공을 세운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 1417~1475)는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무(武)를 함께 겸비한 인물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보한재(保閑齋)이다. 보한재는 천성이 고명(高明)하고 마음이 관대하였다. 젊었을 때는 커다란 뜻을 품어 속된 일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늘 산 속의 절에 머물며 글 읽기를 쉬지 않았고, 집안 일은 마음을 두지 않았다. 어찌나 두뇌가 명석하던지 어떠한 글이나 시도 한번 보고는 곧 기억하였다. 1439년(세종 20) 23세에 친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농시 직장(典農寺直長)이 되고, 1441년에는 집현전 부수찬을 역임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뒤에 집현전에서 일직할 때 장서각(藏書閣)에 들어가 전날 보지 못하였던 글을 남김 없이 읽었고, 어떤 때는 책을 보기 위하여 대신 숙직을 자청하기도 하였다.

    하루 저녘은 밤을 새우며 책을 읽고 있는데, 세종이 환관을 시켜서 보고 오라고 하였다. 환관이 3~4차례 가 보아도 역시 그치지 않고 책을 읽다가 닭이 운 뒤에야 잠을 자, 임금은 돼지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잠든 틈을 타 덮어 주도록 명하고, 아침에 일어나서야 비로소 알았다 한다. 1442년 일본에 가는 통신사(通信使)의 서장관(書狀官)을 뽑을 때 마땅한사람이 없었다. 마침 보한재가 추천되었는데, 세종이 말하기를, “경이 병이 나서 여위었다 하니 갈 수 있겠는가.” 하니, “신이 병이 나았으니 어찌 사양하오리까” 하고는 일본으로 갔다. 일본에 갈 때에는 언제나 천기(天氣)를 잘 알아 늙은 뱃사공도 그를 미치지 못하였다. 일본에서는 보한재의 학문을 흠모하여 일본인이 다투어 시를 요구하자 일필지휘로 글을 써 주니 모두가 탄복하였다. 이 일로 사신이 일본에 갈 적마다 반드시 그들은 보한재의 안부를 물었다 한다.

    또한 일본에서 돌아올 적에 갑자기 태풍이 불자 사람들이 크게 놀라며, “자고로 아이를 밴 여자는 뱃길을 사납게 한다 하니 바다에 던저 제사를 지내자” 라고 하며 임신한 여자를 붙잡으려 하자, 보한재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사람을 죽여서 살기를 꾀하는 것은 덕 있는 행동이 아니다” 하며 말렸고, 그러자 금새 바람이 멎었다 한다. 보한재는 집현전 학사로 ‘훈민정음’ 창제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중국 음을 한글로 표기하기 위하여 유배 중이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의 도움을 얻으러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요동을 13번이나 내왕하였으며, 언어 학자인 황찬도 보한재의 뛰어난 이해력에 감탄하였다 한다. 한글이 배우기 쉬우면서도 과학적인 글이 된 것은 보한재의 이러한 노력에 힘 입은 바 크다.

    보한재는 문장에도 뛰어나 많은 글을 남겼는데, 1451년(문종 1)에 명나라 사신 예겸(倪謙)이 오자 왕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시회에 나가 태평루(太平樓)에서 시를 지었다. 먼저 예겸이 시를 짓자 보한재도 그 운(韻)을 써서 시를 지으니, 예겸이 탄복하고 돌아 갈 때에 글를 지어 보내기를, “시를 짓는 솜씨가 일찍이 굴․송(屈宋: 離騷와 제자 宋玉)의 단(壇)에 올랐으니, 그 명성이 조정의 끝까지 가득찼네” 라고 하며 동방의 명인(名人)으로 칭찬하였다. 보한재가 수양대군(세조)을 모시게 된 연유는, 직제학을 역임할 때인 1452년(문종 2) 수양대군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추천되어 동행한 일이 계기가 되었다. 1453년 계유정난으로 세조가 왕권을 잡을 때 보한재는 외직에 있었으나, 일찍이 밀모에 참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수충협책 정난공신(輸忠協策靖難功臣) 1등에 책훈된 뒤에 곧 도승지에 올랐으며, 1455년 동덕좌익공신(同德佐翼功臣)의 호를 받고 고령군(高靈君)이 되었다. 세조는 특히 아껴 매양 이르기를, “옛날 제환공(齊桓公)이 관중(管仲)에게, 한고조(漢高祖)가 장량(張良)에게, 광무제(光武帝)가 등우(鄧禹)에게, 촉선주(蜀先主)가 공명(孔明)에게, 당태종(唐太宗)이 위징(魏徵)에게 대한 것과 내가 숙주(叔舟)에게 대하는 것은 모 두 한 가지라” 하며 그 신임을 말하였다.

    보한재는 사방에서 오는 사신을 접대할 때 미리 사신의 질문과 왕의 답변을 정리하여 세조와 사신의 중간에서 그 중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일찍이 문종은 승하하면서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門)과 함께 어린 단종을 잘 보살펴 달라는 유언을 하였다. 그러나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자 사육신(死六臣)은 목숨을 버리며 의(義)를 지켰다. 달구어진 쇠로 다리를 지지자 성삼문은 이를 막물고 참으며 앞에 선 보한재를 보고, “처음 나와 집현전에 있을 때, 세종께서 날마다 단종을 안고 나오셔서 유생들에게 ‘내가 죽은 후에 경들은 모름지기 이 세자를 생각하여라’ 라고 하신 말이 아직 귀에 쟁쟁한데 너 혼자 잊었단 말인가” 하니 보한재는 대할 낯이 없었고, 다시 성삼문을 문초할 때 임금은 자리를 피하라고 하였다 한다.

    1456년 병조 판서에 올라 국방에 필요한 외교 응대의 일을 위임 받아 사실상 예조의 일까지 함께 관장하였고, 1459년에는 좌의정에 올랐다. 이 무렵 동북 방면에 야인(野人)의 침입이 잦았는데, 보한재는 강경론을 펴 1460년(세조 6) 강원․함길도의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야인을 정벌하였다. 야인 토벌을 위하여 임금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자, 세조는 담장 밑에 심어져 있는 박덩굴을 가르키며, “열매가 잘 맺어질까” 하고 물으니 보한재가 대답하기를, “익지 않은 채 철이 벌써 늦었으니, 신의 생각에는 결실할 것 같지 않 소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연히 하나가 맺혀서 술잔을 만들었고, 세조는 시 한 수와 술을 내리어 위로한 뒤에, 이내 같은 모양의 사기 그릇을 만들어 궁중의 잔치에 쓰게 하였다.

경은 비록 내 말을 웃었으나 (卿雖笑我)
바가지는 이내 이루어졌다 (我瓢旣成)
쪼개어서 술잔을 만들어 (剖以爲杯)
그지없는 정을 보내노라 (以示至情)

    보한재는 군사를 몇 개 부대로 나누어 여러 길로 한꺼번에 진격하는 전략을 써 야인의 소굴을 크게 소탕하는 전과를 올렸다. 적이 밤을 틈타 진지를 쳐들어 와 일대 격전이 벌어졌는데도, 누운 채로 막료들을 불러 시 한수를 읊기를,

적중(敵中)에 서리 내려 요새(要塞)의 지경이 찬데 (虜中霜落鐵衣寒)
철기(鐵騎)가 백 리 사이를 마음대로 달린다 (突騎橫行百里間)
밤새 싸움이 그치지 않았는데 날은 밝으려 하고 (夜戰未休天欲曉)
누어서 보니 칠성별이 정히 반짝이는구나 (臥看星斗正闌干)

하였다.



    구(具)정승, 신(申)정승

    한때 영의정에 올랐을 때 마침 구치관(具致寬)이 새로 우의정이 되었다. 하루는 세조가 두 정승을 불러 이르기를, “오늘 내 경들에게 질문을 할 터인즉 답을 못하면 벌을 사양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 묻기를, “신정승(申政丞)” 하고 부르자, 보한재가 곧 대답을 하였더니 세조가 이를기를, “내가 새로 된 신정승(新政丞)을 불렀는데 경이 대답하였으니 경이 대답을 잘못했도다.”하며 커다란 잔으로 벌주를 내리고, 또 이르기를, “구정승(舊政丞)” 하고 불렀다. 구치관이 대답하자 세조는, “난 옛〔舊〕정승을 불렀는데 경이 대답을 잘못했네” 하며 그에게도 벌주를 내렸다. 그리고 나서 다시, “구정승(具政丞)” 하고 부르니 이제는 보한재가 대답을 하였다. 그러자 세조는 구(具)정승을 불렀는데 보한재가 답변을 하였다 하여 벌주를 내리고, “신정승(申政丞)” 하고 불러 구(具)정승이 답하니 또 벌주를 주었다. 그러자 다시 세조가, “구정승(具政丞)” 하고 불렀으나 둘 다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세조는, “임금이 불렀는데도 신하가 대답이 없음은 예가 아니다” 하며 역시 벌주를 주었다. 이렇게 종일토록 벌주를 마시니 두 정승은 크게 취하여 편전에 드러누워 버렸다 한다.

    특히 보한재는 지리학에도 밝아 한편으론 일본에 사신으로 가거나 북쪽으로 출정하여 야인을 정벌하면서도 지나는 곳마다 산천 요해지를 기록하여 지도로 만들었고, 한(漢)․왜(倭)․몽고(蒙古)․여진(女眞)의 말에도 능통하여 통역을 빌리지 않고도 뜻이 통하였으며, 뒤에 손수 모든 나라의 말을 번역하여 책으로 만들자 역관들은 이 때부터 스승에게 일부러 배울 필요가 없었다 하였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남이(南怡)의 옥사를 처리하여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輸忠保社炳幾靖難翊戴功臣)의 호를 받았고, 이듬해 겨울 예종이 승하하자 대왕대비에게 후사(後嗣)의 택정을 서두를 것을 건의하여 대통(大統)을 잇는 데 공을 세웠다.

    성종(成宗)이 즉위하자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의 호를 받고 영의정에 다시 임명되었다. 늙어 병을 핑계로 여러 번 사직하였으나 그 때마다 대비(大妃:貞憙王后)가 전교를 내리어, “세조께서 매양 경을 위징(魏徵)이라 칭찬하였는데, 이제 그 일을 잊었는가. 어째서 사면하려 하오”하였고, 또한 성종은 말하기를, “내 들으니 대비께서 전교가 계시었고, 세조께서 매양 예종에게 이르기를, ‘내 아무와 더불어 큰 법을 정했으니 너희들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태평을 누리리라’ 하시더니, 이제 내 나이가 어리고 또 학문이 없는데 경이 어찌 사직하려 하오” 하며 극구 말려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저술 활동에도 힘 써 많은 업적을 남기고 59세인 1475년(성종 6) ‘인생이란 마침내 이에 그치고 마는가' 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시호는 문충(文忠)이 내려졌다.



    쌍분으로 모신 보한재의 유택

    보한재의 유택 아래에는 종손의 집으로 보이는 집이 있고, 그 집 왼편을 돌아 산으로 오르면 근래에 세운 신도비(옛 것은 비각에 안치)가 있고, 그 옆에 ‘한글창제사적비’가 있다. 신도비는 귀부에 오석의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는 이수를 얹었다. 1971년 세운 비의 정면에는 역임한 벼슬을, 옆과 뒷면은 국한문 혼용체로 업적을 적었다. ‘輸忠協策靖難同德佐翼保社炳幾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兼領經筵藝文館春秋館弘文館觀象監事禮曹判書 高靈府院君 文忠公 保閑齋 申先生諱叔舟之墓. 貞敬夫人 茂松尹氏祔左’ 라고 쓰인 도비의 공신명(功臣名)․품계(品階)․관직(官職)은 읽는 데도 한참이 걸린다. ‘한글창제사적비’는 보한재가 한글 창제에 커다란 공헌을 했음을 기념하기 위하여 1971년 525주년 한글날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묘로 오르는 길 오른쪽에는 비각(碑閣)이 있는데, 이 곳에 옛 신도비를 안치하였다. 정방형 기단에 정방형 돌기둥으로 만든 비는 형태가 보통의 것과 다르다. 폭과 두깨가 같은 비는, 옥개석도 없이 본래의 비신을 깍아 사각뿔 모양으로 만들었고, 오래되어 문자 식별은 어렵다. 비각 위에 있는 묘는 쌍분인데, 묘 앞에는 각각 상석과 향로석 그리고 장명등이 쌍으로 놓여 있다. 앞에는 문신석이 양쪽에 있고, 다른 묘에서 보기 어려운 무신석도 양쪽에 있다. 봉분은 1층 기단을 쌓고 호석 없이 봉분만 조성하였고, 두 묘 가운데는 묘비가 서 있다. 특이하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 간 묘비명에는, 먼저 새로 세운 신도비에 있는 내용이 그대로 새겨 있고, 끝에는 ‘配茂松郡天人尹氏之墓’라고 되어 있다.



    신숙주부인전

    윤씨(尹氏) 부인은 영의정 윤자운(尹子雲)의 누이인데, 나라의 대의(大義)를 생각하여 가정을 버리고 목숨을 끊은 것으로 전해진다. 작가 미상의 「신숙주부인전(申叔舟夫人傳)」에 따르면, 밤이 깊어 초췌한 얼굴을 하고 보한재가 대궐에서 돌아오자, 부인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하고 왕에 올랐음을 직감하였다. 보한재는 문종이 임종 시 집현전 학사에게 어린 단종을 부탁하며 내려 준 갑옷을 만지며 눈물을 흘렸다. 세조는 보한재의 문장과 재주를 아껴 자기에게 돌아 올 것을 부탁하고, 보한재는 8명의 자식을 위하여 세조를 따르겠다고 말하였다. 평소 성삼문과 친하게 지냈던 보한재는 성삼문 등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잡혀 새남터로 사형을 받으러 가자 무척 괴로워하였다. 한편 바느질하던 윤씨 부인은 학사들이 사형장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 마땅히 자신의 남편도 그에 연루되어 죽음을 택할 것으로 알고 죽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죽기는 커녕 대신이 되어 돌아 온 남편은, 혼자서 다락 위에 올라 대들보 아래서 베를 가지고 부인을 보고 그 사연을 물었다.“당신이 평일에 성학사 등과 서로 형제와 다름 없이 좋아 지내더니, 이제 성학사 등은 옥사가 있었다 하니 당신도 마땅히 그들과 함께 죽을 것이므로 통지가 있기를 기다려서 자결을 하려고 하였더니, 이제 당신이 살아서 돌아 온 것은 생각 밖의 일이오”하므로 보한재가 심히 부끄러워서 몸 둘 바를 몰랐다. 부인은 이튿날 결국 목을 매어 죽었다 한다.

    묘 둘레에는 노송이 우거지고 앞에는 포천 평야가 넓게 들어오고, 그 아래 마을에는 저녘 연기가 뽀얗게 피어 오른다. 보한재는 선비가 학문하는 것을 농사를 짓고 베를 짜는 것에 비유하여 말하기를, “대체로 심어서 김을 매고, 김매어 수학하는 것은 농사 짓는 자의 일이요, 누에 먹여 실을 뽑고, 실 뽑아 명주를 짜는 것은 누에를 먹이는 사람의 일이다. 심지 않으면 싹이 나지 않으며, 누에를 치지 않으면 고치를 얻을 수 없으니, 어디에 갈고 뽑을 수 있는 것인가. 만약에 김매는 것을 걷어 치우면 우리는 곡식이 쓸모 없이 자라는 것만 볼 것이요, 만약 실을 뽑는 것을 그만 둔다면 고치에서 나비가 나오고 말 것이니, 어 찌 수확과 명주 짜는 것을 바랄 것인가. 결국 추위와 배고품에 떨게 될 것이다. 선비의 학문도 이와 같다. 학문에 뜻을 두는 것은 씨 뿌리고 누에 치는 것이며, 근면하게 배우는 것은 김매고 실 뽑는 것이며, 마침내 덕이 이루어지고 이름이 나게 되어 일을 맡아 처리하게 되는 것은 수확하고 명주 짜는 것과 마찬가지다.” 라고 하였다. 보한재는 임종 할 때에 “장례식을 간소하게 하고 서적(書籍)을 같이 묻어라” 라고 일렀듯이 보한재는 많은 저술 활동을 하였다. 1472년(성종 3) 「세조실록」․「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 한 것을 비롯하여, 세조 때부터 작업해 온 「동국통감」의 편찬을 성종의 명에 의하여 그의 집에서 총관하였다. 또한 여러 나라의 말과 글을 풀이한 역서(譯書)를 저술하고, 특히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지어 일본 정치 세력의 강약․병력․풍속․지역의 원근․사신과 선박의 왕래 절차 등을 자세히 기록하여 일본과의 외교에 큰 도움을 주었다.

굽힐 수 없는 절개, 유응부

중국이 놀란 시재, 차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