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5백 년 동안에 이름난 임금을 들라면 누구나 세종 임금을 첫 손가락으로 꼽을 것이요, 이름난 정치가를 들라면 한결같이 세종 임금을 도와 위대한 업적을 남긴 황희 황정승을 꼽을 것이다. 황희(黃喜, 1363∼1452) 정승은 고려 공민왕 12년에 태어나 조선 문종 2년에 세상을 떠난 이름난 정치가이다.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 村)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4대 임금을 도와 많은 업적을 남기었는데, 특히 세종의 지우(知遇)을 입어 빛나는 업적을 남기었으며 청백리(淸白吏)로도 유명하다. 개경에서 출생한 방촌은 어릴 적 이름이 수로(壽老)이었다. 14세에 음관(蔭官)으로 복안궁 녹사(福安宮錄事)가 되고, 21세에 사마시에 합격,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에 성균관 학관이 되었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고려에 대한 충절로 충신들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이곳에서 방촌은 평생 벼슬과는 인연을 끊고 학문에만 전념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방촌의 지모에 반한 조선 태조의 끈질긴 간청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벼슬 길에 나서게 되었다.

  조선조에 발을 들여 놓은 방촌은 태종 때 왕의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 6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태종이 장자인 양녕대군을 제치고 지차인 충령대군(후에 세종)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후세에 큰 환란의 씨가 된다고 주장하며 반대하였고, 급기야는 1413년(태종 16) 세자 폐립 문제로 왕의 노여움을 사 관직을 박탈당하였다. 그러나 성군인 세종은 즉위 4년에 태종의 부탁을 받고 좌참판에 발탁하였다.

  큰 인물이 큰 인물을 만나 평생을 두고 공적으로는 군신의 관계로, 사적으로는 벗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세종의 업적에 큰 힘을 보태었다. 공은 좌·우의정을 거쳐 18년 동안 영의정에 재직하면서 부국 강병에 꾸준히 힘쓰다가 세종 31년(1449) 86세로 벼슬길에서 물러나 이 곳 파주의 임진강 가에 반구정(伴鷗亭)을 짓고 강물 위를 날아가는 갈매기를 벗 삼아 시를 읊으며 남은 생을 보냈다. 돌아가신 후 익성(翼城)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세종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덕망 높은 황정승
  하루는 방촌이 퇴궐하여 집에 오니 하녀 두 명이 서로 매우 다투고 있었다. 방촌이 온 것을 알고도 그녀들은 싸움을 그치지 않았다. 그 중 한 하녀가 방촌에게 달려와 사건 전말을 이야기하며 시비곡절을 가려 주기를 청하니,
  "네 말이 맞다.”
하였다. 이에 성이 난 다른 하녀가 항의를 하며 자초지종을 말하니,
  “그래 네 말도 맞다.”
하였다. 그 때 부인이 그 곁에 있다가, 이 말도 맞고 저 말도 맞다 하니 도대체 어느쪽 말이 맞는 것이냐고 따지자
  "그래 부인의 말도 맞소(夫人之言是也).”
하였다 한다. 이 일화는 오로지 나라를 걱정하고 집안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 성품과 하찮은 일에 마음을 두지 않는 대인의 풍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루는 집 안에 있는데 밖의 복숭아가 무르익어 먹음직스러웠다. 그런데 이웃 집 아이들이 와서 다투어 돌을 던지며 복숭아를 따자 천천히,
  "다 따 먹지는 말아라, 나도 맛 좀 보자.”
라고 말할 뿐이었다. 조금 있다가 나가 보니 나무엔 복숭아가 하나도 없었다. 한번은 아이들이 배를 돌로 던져 따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시동(侍童)을 부르니 아이들이 무서워 도망갔다. 시동에게 버들고리를 가져 오라하여 떨어진 배를 담아 이웃집 아이들에게도 나누어주라 하였다 한다.

  「해동잡록(海東雜錄)」에 의하면, 방촌이 좌의정으로 있을 때 모친 상을 당하였다. 이에 벼슬을 그만두고 어머니 묘 곁에 초막을 짓고 아침 저녁으로 예를 올렸다. 조정에서는 방촌의 후임을 두지 않고 두어 달이 지나 기복(起復:부모의 상중에 벼슬에 나아감)하게 하여 세자가 명나라에 조근(朝覲:신하가 임금을 뵘)할 때 방촌을 수행하게 하였으나, 방촌은 두 번이나 전(箋)을 올려 간곡하게 사직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그때 명나라에서 세자가 조근할 필요가 없다는 칙명이 있자, 또 사직을 호소하면서 이르기를,
  “세자가 이미 조근하지 않게 되었고, 또 국사가 무사하니 3년상을 마치게 하여 주십시오.”
하였으나, 세종은 기복(起復)의 예는 조종(祖宗)이 이미 정한 법이라 하여 허락하지 않고 이어 하교하기를,
  “지금 황희는 이미 기복을 하였고 나이도 60이 넘었으니, 어찌 소식(素食:고기 반찬이 없는 밥)을 하겠는가, 내가 친히 개소(開素:소식을 하던 사람이 육식을 시작함)하는 것을 보려 하였으나, 마침 몸이 불편하니 정원(政院)이 그를 초치(招致)하여 육물(肉物)을 전하도록 하라.”
하였다. 방촌이 빈청(賓廳)에 나아가니 지신사(知申事) 정흠지가 임금의 뜻을 전달하고 고기를 권하였다. 그러자 방촌은 머리를 조아리며,
  “신이 아무런 병이 없는데 어떻게 감히 육식을 하겠습니까.”
라고 하며 임금께 잘 말씀드려 줄 것을 청하였으나, 그는 감히 그러지 못하겠다고 대답하였고, 방촌은 이에 머리를 조아리고 울며 개소(開素)하였다 한다.

  또 「청파극담(靑坡劇談)」에는, 문강공(文康公) 이석형(李石亨)이 장원급제 후 정언(正言)이 되어 방촌을 뵙자 강목(綱目)과 통감(通鑑) 한 질씩을 내놓고 문강공에게 제목을 쓰기를 명하였는데, 그 때 못된 계집종이 간소한 음식을 차려 와서는 방촌에게 기대어 앉았다. 그녀는 문강공을 내려 보다가 방촌에게 말하길,
  "술을 드리겠읍니다.”
하니, 방촌이,
  “아직 두어라”
하였다. 계집종이 다시 곁에 한참 서 있다가 성난 소리로,
  “어찌 그리 더디시오”
하니 방촌이,
  “가져 오너라”
하였다. 술을 방촌에게 드린 뒤에 두어 명의 노비의 자식들이 떨어진 옷과 맨발로 방에 들어와 차려 놓은 음식을 모두 먹고, 또한 등을 두들겨도 방촌은 다만,
  "아프다.아프다.”
고만 하였다.
  방촌이 정승으로 있을 때 김종서(金宗瑞)는 공조 판서로 있었다. 일찍이 공처(公處)에서 회합을 할 때 김종서가 공조에 명하여 주과(酒果)를 차려 오게 하였다. 이에 방촌이 그 주과의 출처가 어디냐고 물었고, 공조의 서리(書吏)는 공조에서 해가 느즈막하여 시장하실까 염려되어 임시로 공청에서 주과를 차리도록 하였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방촌은 화를 내면서,
  “국가에서 의정부 곁에다 예빈시(禮賓寺)를 설치한 것은 3공을 대접하기 위함인데, 만약 시장하다면 마땅히 예빈시로 하여금 차려 오게 할일이다.”
하고는 입계(入啓)하여 김종서의 죄를 청하려 하였다. 다른 여러 재상들이 말려 겨우 그만 두었으나, 정승 김극성(金克成)이 일찍이 경연(經筵)에서 이 일을 아뢰고 나서,
  "대신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조정을 능히 다스릴 수 있읍니다.”
라고 하였다.

  세종 말년에 왕은 궁궐 안에 내불당(內佛堂)을 짓고 부처님께 복을 빌었다. 대신들이 짓지 못하게 여러 차례 간하여도 임금은 듣지 않았다. 이에 집현전 학사들이 극렬하게 간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모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집현전이 텅 비게 되었다. 그러자 세종은 눈물을 흘리면서 방촌을 불러 이르기를,
  "집현전 학사들이 모두 나를 버리고 가 버렸으니 이를 장차 어찌하면 좋겠소.”
하였다. 방촌은,
  “신이 가서 달래 보겠읍니다.”
하고 드디어 학사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돌아올 것을 간곡이 청하였다. 유생들
이 반대하며 나무라기를,
  “당신은 정승이 되어 어찌 임금의 그릇된 마음을 바로잡지 못한다 말이요.”
하자, 그래도 방촌은 성을 내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였다. 왜냐하면 그 유생들의 기개가
장차 국가의 앞날을 빛내 줄 것이 기대되기 때문이었다.

   임금의 숭불에 상소하며 반대하는 유생들을 달래어 집현전으로 돌아오게 한 이같은 도량과 인내가 없었던들, 당시 사대부들의 암투를 능히 해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후세에 당쟁과 사화가 끊이지 않고 나라가 매우 어지러울 때 임금들이 한탄하기를,
  “방촌같은 신하만 있었던들 ......”
하고 입버릇처럼 말하였다 한다.

  명재상의 묘를 찾아
  황정승의 묘는 파주의 310번 국도를 따라 금촌읍을 지나 탄현면 금승리 뒷 산에 있는데, 이 곳을 가려면 통일로에서 월롱면 위전리를 지나 좌회전하면 덕은리·능산리를 지나게 되고, 곧 310번 도로와 만나는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 조금 못미친 곳에 군부대 입구 표지와 함께 '황희 선생 묘'라는 입석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5백m 쯤 가면 산 쪽으로 난 좁은 도로가 있고, 여기서 우회전하여 산기슭으로 난 좁은 시멘트 길을 따라 가면 후손이 사는 집과 사과 과수원 그리고 비각(碑閣)이 있다.

  신도비는 목책 너머의 안쪽에 있어 글자를 읽기에는 어려웠으나 그 보존 상태는 휼륭하였다. 묘로 오르는 길은 후손이 사는 집의 담 옆으로 난 돌로 된 30여 계단을 올라가면 된다. 돌계단과 상석은 근래에 마련하였고, 묘는 명재상에 어울리게 큼직하게 만들어졌다. 묘 앞으로는 저 멀리 올망졸망한 낮은 산들이 앞에 둘리어 있어서 구름 속에 있는 듯하다. 잔디가 곱게 자란 앞쪽에는 근래에 돌을 쌓아 넓고 평평하게 만들었고, 그 밑에는 많은 향나무가 심기어 있다. 근래에 설치하여 이끼 하나 없는 상석은 큼직한데, 원래의 상석은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상태로 조그만 것이 묘 왼쪽 한 곳에 버려져 있다. 상석 앞에는 장명등이 고태스런 모습으로 의젓하게 서 있고, 양쪽에는 문신석이 다소곳이 있다. 묘비는 오래되어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지만 글자는 또렷이 알아 볼 수 있다.

   묘비에는 '領議政翼城公 村黃喜之墓. 繼配貞敬夫人 淸州楊氏 '이라고 쓰여져 있는데, 방촌을 뵙는 듯 정겹고 또한 반갑다. 그러나 묘는 흔히 볼 수 있는 묘와는 전혀 다른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능묘의 봉분 주위를 둘러 쌓은 돌을 호석(護石)이라 하는데, 이 묘는 호석을 앞쪽에만 쓴 것이 특이하다. 앞쪽에만 돌로 2단으로 쌓고, 그 양쪽에서 다시 2단으로 돌을 길게 앞쪽으로 쌓아 마치 짐을 가득 실은 마차를 연상케 한다.

  묘의 둘레는 34m, 높이는 4m인 거대한 묘이며, 상석 밑의 북석은 손잡이까지 그 형태가 선명하다. 장명등은 그 형태가 소박 간결하며, 화창은 전후로만 나 있고 오랜 풍상에 씻기운 듯 고태가 흐른다. 우리 일행은 방촌에 대한 추모의 표시로 준비해 온 술과 안주를 상석에 놓고 절을 하였다. 인품이 고매하고 만인의 모범이 될 만한 분의 묘에 와서 참배를 하니 한편으론 감개가 무량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전하는 말에, 조선시대의 정승은 넷 밖에 없다 한다. 이 말은 이 분들의 이름 아래에는 대체로 '정승'이란 말을 붙이기 때문이다. 황희 정승을 비롯하여 맹정승 맹사성(孟思誠, 1359∼1438), 상정승 상진(尙震, 1493∼1564) 오리(梧里) 정승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을 가리키는데, 특히 방촌은 향년 89세에 별세한 장수한 정승으로, 그 뛰어난 학문과 치정(治政)보다는 그 휼륭한 인덕(仁德)으로 인한 처세와 삶의 지혜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