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제희의 풍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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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릉군 북면 성하신당숲


[마을숲 이야기 58] 울릉군 북면 성하신당숲


풍어·무사조업 비는 마을聖地



울릉도 주민들에게 바다는 예나 지금이나 삶의 터전이다. 가족을 부양하고 자식들을 교육시키려면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고 전복과 미역을 채취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이 바람과 물길을 아무리 잘 살핀다 해도 변화 많은 바다에 있다 보면 늘 크고 작은 위험에 처하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바다에서의 사고는 곧 삶과 죽음을 한 순간에 갈라놓을 정도로 치명적이다.

바다로 나가야만 하는 어부들에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 수 없었다. 이런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울릉도 주민은 바다를 다스린다고 믿는 신에게 기대 자신들의 무사안일과 만선의 풍어를 기원하였다.

경북 울릉군 북면 태하동에 자리잡은 성하신당(聖霞神堂)은 거친 파도를 이겨내고 살아가야 하는 울릉도 주민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성난 파도를 잠재운다는 성하신당의 영험은 자못 슬픈 전설과 관련을 맺고 있다.

조선조 태종 때 울릉도 안무사로 파견된 김인우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려 하자 큰 바람이 불어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바람이 수그러들기를 기다리던 중 김인우의 꿈속에 바다신이 나타나 이 섬에 동남동녀(童男童女)를 남겨두고 가라는 계시를 내렸다. 이 계시에 따라 김인우는 어린 남녀아이 2명에게 일행이 묵던 곳에 필묵을 찾아오라고 한 후 몰래 떠나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김인우는 이에 죄의식을 느껴 다시 울릉도를 찾았으나 동남동녀는 이미 죽어 뼈만 남아있었다. 김인우는 억울하게 죽은 아이들의 혼령을 달래기 위해 신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는데, 이것이 성하신당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험한 파도를 잠재운 동남동녀의 효험을 믿고 지금도 새해 첫 출항을 앞둔 뱃사람들은 이곳을 찾아 무사 조업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고 있다.

본래 성하신당은 지금의 위치가 아닌 하천 반대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1933년 대홍수로 인한 하천 범람으로 성황당의 당집과 위패가 사라졌고 이듬해에 현 위치로 옮겨 다시 세웠다.

1969년에는 동남동녀로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이나마 맺어주었고 1978년에는 성황당의 이름을 성하신당으로 바꾸었다. 이런 이유로 성하신당에 모셔진 동남동녀는 상투와 비녀를 튼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런 전설을 간직한 성하신당 숲의 가장 큰 특징은 마을주민의 차별된 공간 활용에 있다. 바닷가 쪽에 위치한 성하신당 숲은 제사를 지내거나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찾는 종교의 숲이다.

반면 낮은 담을 사이에 두고 자리 잡은 성하신당의 뒤편 숲은 주민이 찾아 쉬는 마을숲이다. 태하동 마을주민들은 성하신당과 이를 둘러싼 숲을 죽은 자와 산 자, 종교와 세속이 함께 하는 독특한 이중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성하신당을 감싸고 있는 숲은 바닷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곰솔로 이루어져 있다. 이 숲의 주인인 곰솔은 30~40cm의 제법 굵은 몸집에 비해 바람 탓으로 나무키는 10m를 넘지 못한다.

그러나 아무리 평범한 곰솔일지라도 신당의 존재로 인해 이 숲의 가치는 달라진다. 절과 한몸인 절숲처럼 성하신당 숲은 본디 신당과 하나다. 신당의 종교적 의미가 사라지면 숲의 역할도 퇴색하고 신당에 대한 믿음이 강해지면 숲의 가치도 더욱 커진다.

이런 측면에서 성하신당 숲은 태하동 주민들과 여전히 함께 하는 종교적 의미를 간직한 마을숲이다. 매년 작은 가지조차 건드리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숲을 관리하고 성하신당에서 이루어지는 갖은 행사를 준비하는 태하동 주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이 숲은 보전되고 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지금까지 울릉도 주민뿐만 아니라 육지에서도 성하신당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울릉도 주민들에게 바다의 풍요로움과 위험이 사라지지 않는 한 성하신당과 이 숲의 존재 가치는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한국일보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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