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사람은 양명한 기운을 받아서 태어난다. 그러므로 양명한 빛인 하늘이 조금만 보이는 곳은 결코 살 곳이 못된다. 이런 까닭에 들이 넓을수록 터는 더욱 아름답다. 해와 달과 별빛이 항상 환하게 비치고,바람과 비가 차며,더운 기후가 고르게 알맞은 곳이면 인재가 태어나고 질병도 적다. "

'택리지'가 사람이 대를 이어 부를 전하고 살아갈 터의 조건에 대해 언급한 구절이다. 높은 산이 둘러싸면 아침에는 해가 늦게 뜨고 저녁에는 해가 일찍 떨어지니 일조량이 충분치 못하다. 깊은 골짜기에서 계곡 물은 밤낮으로 넘쳐 나는데 바람이 막혀 있으니 음랭한 기운이 산안개로 변해 사람이나 초목을 병들게 한다. 그러므로 함지박처럼 오목한 터는 음기가 강해 양택지보다는 사찰 터로 더 잘 맞는 땅이다.

우리는 보통 세상에서 유명한 전통 사찰은 경관이 빼어난 명산의 최고 명당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절집은 대개 남향으로 지어져 언제나 햇살이 따사롭고,한쪽에 마련된 샘에서는 맑고 찬 감로수가 지천으로 흘러넘치고, 사방에 우뚝 솟은 산은 마치 어머니처럼 절을 다정히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절집 본연의 기능과 역할을 따져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절은 승려가 불상을 모시고 부처의 가르침인 불도(佛道)를 닦으며 부처가 설법한 가르침인 '교법'을 일반 대중에게 알리고 펴는 집이다. 그러므로 명찰(名刹)은 사람이 건강히 사는데 필요한 양명한 기보다는 부처의 영기(靈氣)가 서린 장소가 더 적합하다. 밝은 빛보다는 촛불의 은은한 어둠이 더 어울리고, 쾌활하고 행복해 하는 분위기보다는 약간 엄숙하고 슬픈 느낌이 깔린 상황이 더 적절하니 사방이 트인 곳 없이 산이 에워싼 함지박의 터가 절터로는 오히려 명당이 된다.

평소 절제된 생활과 소식(小食)으로 질병과 거리가 멀 것만 같은 스님들도 각종 질환에 시달린다. 그중에서 신경계나 호흡기계 질환은 일조량이 적고 음랭한 기가 많은 절의 풍토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분석됐다. 노스님은 대개 큰 절보다는 그에 딸린 암자에서 주로 기거하는 데, 함지박 터가 특히 노인에게 해로운 것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있다.

한국의 부촌 중 일반적인 시각과 가장 커다란 괴리를 보이는 함지박 마을이 종로의 평창동이다. 평창동은 보현봉 아래의 산기슭으로 호화로운 저택이 밀집해 한국의 상류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주위를 에워싼 연봉들을 보면 마치 불꽃이 피어오르는 형상의 화산(火山)이다. 이처럼 산세가 유순하지 못한 채 수많은 바위와 암석으로 이루어진 것을 풍수는 문필봉이라 부르며 문장가를 배출할 터로 여긴다. 박종화(朴鐘和) 문학의 산실인 작수루가 이곳에 있었고, 현대엔 작가들의 보금자리인 영인문학관이 들어서 이곳이 작가의 땅임을 대변한다.

또 평창동은 높은 산이 사방을 에워싼 가운데 그 중심부로 계류가 급히 흐른다. 계류가의 정자에 올라 음풍농월하거나 자연에 안긴 채 시 · 서 · 화에 빠져 세상의 번잡함을 잊기에 좋다. 그런 의미에서 평창동은 일찍부터 작가와 예술가의 터로 주목을 받던 곳이었다.

고제희 대동풍수지리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