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최고의 풍수비기, 손감묘결 목록으로

2008년 다산초당 고제희 평역

『손감묘결』은 언제 누구에 의해 쓰여진 것인지는 명확치 않지만, 한국의 산천을 실제로 돌아보고 각지의 풍수적 길흉을 기술한 풍수서로써 그 중 하나가 왕릉으로까지 선정된 귀중한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패철로 방위적 길흉을 판단한 결록이 전체의 57%인 124개나 되어 이기 풍수학을 모르고서는 해석이 곤란한 책이다. 따라서 조선 최고의 비기인 『손감묘결』을 평역하는 작업은 전통 풍수학과 현대 풍수학을 연결하는 가교(架橋)를 건설하는 일이며, 나아가 풍수사마다 각자의 논리로 세상을 풍미하는 혼탁한 옛것을 바탕삼아 앞으로의 풍수학은 어떤 모습으로 발전해야 하는가를 제시하는 일도 된다.


1)서평

조선 최고의 풍수 비기는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풍수는 개성과 한양을 고려와 조선의 도읍지로 결정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으며, 손꼽히는 여러 집안의 흥망성쇠에 빠지지 않고 거론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유학 ? 무학 ? 이학 등과 함께 십학十學의 하나였고, 한문에 능통한 선비가 아니고는 풍수사가 되기 어려웠다. 이처럼 조선 역사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한 풍수의 비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유일한 풍수서가 있으니, 바로 『손감묘결巽坎妙訣』이다. 손巽은 바람이고, 감坎은 물이기 때문에 즉 『풍수요결』이란 뜻이다. 당시 대부분의 학문이 그러하듯이 조선의 풍수서는 중국책의 필사본이 아니면, 근거 없는 풍수사의 비망록적인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실제로 우리 산하에 숨겨진 명당과 길지를 주변의 산천과 함께 그림으로 그려 전한 『손감묘결』은 한국 풍수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불편한 교통과 어려운 경제적 요건에서 전국 218개의 길지를 답사하고 기록한 노력과 정신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만큼이나 놀랍다.
<대동풍수지리학회> 이사장 고제희 선생은 한국 풍수학이 사회적으로 주목받지 못하고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지 못하는 원인에는 풍수를 배웠다고 하나 선배 풍수사가 남긴 『비기(秘記)』조차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열악한 현실에 책임이 있다고 느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한국 풍수의 맥을 잇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였고, 조선의 유일한 풍수서 『손감묘결』을 평역하게 되었다. 이 책에는『손감묘결』의 한문식 결록을 한글로 풀어쓰고 상세히 감평하여 전국곳곳 내 고장 산천의 길지를 알아보게 하였고, 다소 어려운 풍수 용어와 지명에 주해를 달아 이해를 도왔다.

역사가 있는 전국 78개 군현의 명당터를 밝히다.
1800년대 중엽 이후에 풍수학에 밝은 관리 신분의 학자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손감묘결』은 수많은 명당터를 소개하였다. 각 78개 군현에 전하는 218개의 길지를 마치 현대의 지도를 입체적으로 보는 듯 그림으로 그려 주변 산과 지명을 부기하였고, 풍수적 물형과 발복의 내용을 수록하였다. 이러한 명당터는 현재 이미 묘를 썼거나 도시화가 진행되어 변형된 곳이 많지만 지금도 찾아가 볼 수 있는 곳이 상당하다.
『손감묘결』은 바람과 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방향을 풍수적 방위로 살펴 산줄기의 정기가 모인 자리를 찾는 ‘이기풍수론’에 기반을 두었다. 그리하여 중국의 풍수이론을 한국 산세에 일방적으로 적용한 다른 풍수 풀이와는 차별화 된다. 이를 통해 조선 사람들이 중국에서 전해진 풍수이론을 우리 산세에 맞게 발전시켜 활용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방위적으로 길흉을 판단하는 이기풍수론은 산줄기의 모양이나 형세를 눈이나 기감으로 유추하여 혈(산줄기의 정기가 모인 자리)을 찾는 형기론이나 사람이나 동물의 모습에 빗대어 혈을 찾는 물형론보다 더 객관적이며 가장 논리적이다. 따라서 현재 변형된 한국의 산세에 적용해 새로운 명당터를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조상의 묘지를 자연의 생명력이 왕성한 터로 택해 영혼의 편안함을 구하거나, 주택을 길지에 지어서 지력(地力)에 의한 건강과 행복을 꾀하거나, 마을이나 도시가 들어설 부지를 선택하거나, 혹은 생기가 부족하거나 결함이 있을 경우 살기 좋은 터로 바꾸는 것은 풍수학이 일상에 쓰이는 방법들이다. 그러나『손감묘결』의 의의는 단지 명당터를 알리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천안삼거리, 남태령, 천마산, 달래강 등 지명의 유래나 발복의 내용으로 내 고장, 우리 산천의 풍수지리학적 위치를 알 수 있다. 또한 하늘과 땅의 자연현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여 자연과 조화롭게 살고자 했던 조상의 정신을 돌아보게 한다. 이로써 우리는 내 고장의 터, 조상의 묘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동양의 지리관이며 경험 과학적 학문 ‘풍수학’의 재발견!
바람과 물의 순환 궤도와 양[양기(陽氣)]과 땅의 생명력[음기(陰氣)]은 어떤 형태든 사람을 비롯한 생물의 생명과 활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풍수학은 사람이 보다 건강하고 안락하게 살터와 방향(좌향)을 선택하는 방법이 학문적으로 체계화되어 전승, 발전된 것이다. 이 방법은 현대 지리학, 지질학, 생태학, 조경학, 건축학 등 다방면에서 응용 가능한 합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 이유로 서양에서는 환경오염이란 재앙을 치유할 대안으로 동양의 풍수학을 새롭게 주목하고 있다. 풍수학은 지형이나 바람? 물의 운행에 따른 잠재적 흉조를 감지하고 또 치유하는 데 탁월한 메커니즘을 가졌고, 나아가 초현실적 요소만 걷어 낸다면 역사적인 진리를 가득 담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가치를 가지고 있다. 특히나 『손감묘결』은 한국 풍수학의 전통과 역사를 알려 경험 과학적인 학문의 면모를 증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직 풍수학이 비과학적이고 미신이라는 인식이 만연하다. 이러한 때에 『손감묘결』평역본의 출간은 전통 풍수학과 현대 풍수학을 연결하는 가교(架橋)를 건설하는 일이며, 풍수사마다 각자의 논리로 세상을 풍미하는 혼탁한 풍수계에서 21세기 풍수학은 어떤 모습으로 발전해야 하는가를 제시하는 일도 될 것이다. 자연적 요소 중에서 좋은 것만 취사선택하고자 했던 조상의 지혜가 담긴 풍수지리학이 생활 철학으로써 다시금 우리 삶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2)책속으로

1931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간행된 『조선의 풍수』라는 책은 조선왕조의 지관이던 전기응이 자문하고, 총독부 문서과 소속이던 무라야마 지쥰이 저술한 일본어로 쓰인 풍수지리서이다. 우리가 이 책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 당시의 음택과 양택, 양기풍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풍수이론을 상세하게 다루었고, 또 한국의 장묘제도와 풍수신앙과 영향과 국가?도읍의 풍수까지 폭넓게 서술해 풍수서로서 간과할 수 없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 내용 중 ‘조선 민간의 풍수서’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조선 풍수서 중에도 실제로 산천을 돌아보고 각지의 풍수적 길흉을 기술한 귀중한 것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도선비결道詵秘訣』이라는 답산기이고, 하나는 『손감묘결巽坎妙訣』이다. 손감묘결은 언제 누구에 의해 쓰인 것인지는 명확치 않지만, 주로 경기도 일원에서 길지의 그림을 수록했음으로 조선에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 2백여 개의 길지를 수록하고, 그 소재와 유형, 소응을 부기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근래 왕가의 산소로 선정된 점으로 보면 풍수적 식견이 상당히 명확한 사람에 의해 선별되고 그려진 것이라 생각한다.’
-<손감묘결에 대한 이기풍수학적 고찰 머리글> 중에서

장사 지낸 후 5~6년이 지나면 장원급제하는 후손이 여러 명이 나와 7~8대에 걸쳐 재상이 배출된다고 했다. 풍수학은 주위 산들의 모양과 방위를 살펴 인물을 평가하는데, 자방子方의 산은 풍수학에서 천첩天疊이라 부른다. 따라서 자子방에 우뚝 선 천마산은 고위 공직자를 배출할 산이고, 오방午方에 표시된 예봉산은 태마太馬로써 운수업자를, 병방丙方의 운길산은 태미太微로써 후손 중에 훌륭한 과학자가 태어날 산으로 본다. 옛날에는 과거급제 후 관직이 높아지는 것만을 최고로 여겼으나, 현대는 다른 직종도 사회적 지위를 누릴 수 있으니 발복의 내용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혈장 아래에는 보통 혈의 생기가 앞쪽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전순氈脣이 있는데, 본 용혈도는 혈장 좌우측에 서씨 성을 가진 평민의 묘가 3기나 있다고 전한다.
-<제1장 경기도 양주> 중에서

옛날 경상도 안동 땅에 의좋은 형제가 살았는데, 어쩌다가 동생이 먼저 천안에 있는 박진사의 딸과 혼례를 치르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형보다 먼저 장가를 갈 수 없다며 자취를 감추었고, 부득이 형이 대신 혼례를 치르게 되었다. 형은 동생의 처가 될 뻔한 규수와 혼례를 치르기가 언짢아서 마침 천안 객사에 묵고 있던 전라감사의 아들을 대신 신방에 들여보내 부부의 인연을 맺게 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형은 전라감사의 사위가 되었으며 자취를 감춘 동생은 서울로 가 과거에 급제하고 그곳에서 장가도 들었다. 얼마 후 세 사람은 천안삼거리에서 만났는데, 이곳을 잊을 수 없는 곳이라 하며 각각 나무를 한 그루씩 심었다. 형은 서울로 가는 길목에, 동생은 경상도로 가는 길목에, 감사 아들은 전라도로 가는 길목에 각각 버드나무를 심은 후부터 이곳에는 수양버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제2장 충청도 천안> 중에서

나주군 반남면 신촌리에는 ‘벌명당’에 얽힌 전설이 전해진다. 반남 박씨의 시조인 박응수朴應洙의 아들 박의朴宜는 아비가 죽자 지관에게 명당을 부탁했다. 지관은 명당을 찾았으나 하늘로부터 벌을 받을까 두려워 다른 곳을 소개하였다. 이를 눈치 챈 박의는 지관이 숨긴 명당을 찾은 후 땅을 팠다. 그때 땅속에서 커다란 벌이 나와 지관을 쏘아 죽였다. 반면 박씨 집안은 나날로 번성했고, 그 묘를 ‘벌명당’이라 불렀다. 나주 동쪽 40리 지점에 용마음수형龍馬飮水形의 명당이 있는데, 안산은 비휴를 닮았다.
-<제4장 전라도 나주> 중에서

진주 시내의 상봉동에는 진주의 진산인 비봉산(飛鳳山 139m)이 있고, 이 산과 마주 보는 평지에 ‘봉의 알자리’라는 인공구조물이 있다. 흙으로 두둑이 쌓아올려 산처럼 만들고 한가운데를 움푹 파내어 마치 새의 알자리처럼 만들었다. 어느 시대에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옛날 이 근처에는 민가도 없었고, 우거진 숲과 어울려서 아름다운 풍광이었다고 전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현재의 비봉산에는 봉암鳳巖이 있어 예전에는 대봉산大鳳山이라 불렸는데, 대봉산 아래에 모여 살던 진주 강씨네는 대봉산의 정기를 받아 뛰어난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고 한다. 조선을 창국한 이성계는 산남山南 지방에서 강씨 ? 정씨 ? 하씨 등 세 성의 인물이 많이 나올 것이 염려되어 무학대사로 하여금 지리 형세를 살피도록 하였다. 진주에 다다른 무학대사가 비봉산에 올라가니, 비봉산이 바로 명당이고 이 산의 지맥이 대룡골의 황새터와 연결돼 있어 크게 놀랐다.